닭 다섯 마리
허세욱
박군이 뜻밖에 내 연구실을 찾아왔다.
그는 두 자쯤 길이의 포장된 액자를 들곤 꺼벙하게 서서 멀뚱멀뚱 껌벅이는 모양이 비 맞은 장닭이었다. 내 앞으로 다가와선 “선생님!” 하고 부를 뿐 좀처럼 말문을 열지 못한 채 쩔쩔매고 있었다.
내일이 스승의 날인지라 대강 짐작이 갔지만, 엄청 숫기가 없어 보이기에 내가 먼저 웃으면서 “그게 무어니?” 말을 걸었다. 박군은 과연 힘을 얻은 듯 “아버님께서 선생님께 갖다드리라 해서요.” 수줍어하긴 마찬가지였다. “무엇인데?” 이번엔 내가 다그쳤다.
그는 무언지 중얼거리며 액자의 포장을 풀었다. 웬걸! 영롱한 자개로 정교하게 장식한 그림, 벼슬을 꼿꼿하게 세운 장닭이 거드름을 피우며 섰고, 그 뒤로 장닭에 기대여 다소곳이 암탉, 그리고 그 옆으로 옹기종기 놀고 있는 병아리 세 마리. 이래서 닭 다섯 마리를 자개로 양각한 액자, 그 하얗게 얼룩진 조개껍질은 까만 바탕 위에서 빤질빤질 광채를 내고 있었다.
나는 “야! 절품이다!” 아낌없는 찬사로 고맙다는 인사를 대신했다. 그러나 박군의 아버님이 왜 느닷없이 선물을 보내 왔고, 하필이면 닭 다섯 마리를 양각한 공예를 골랐을까라는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나는 ‘중국 문학사’를 고대, 근대, 현대로 나누어 세 학기에 걸쳐 속강하고 있다. 그 세 번째 과목인 ‘중국 현대문학사’를 강의할 때, 주자청(朱自淸)이라는 이십 년대의 중국 수필가를 빼놓을 수 없었는데, 그를 말할 때 그의 대표작 『배영(背影)』은 실 가는 데 바늘이었다. 그런데 그 대목이 내게는 쉬어가는 성황당이었다. 그 작품을 격정적으로 추켜올리다가 자칫 강의가 삼천포로 빠지기 일쑤였다. 그러니까 내 강의의 함정이기도 했다.
그 글에서 주자청은 조모의 초상을 치르고 북경으로 돌아가는 정거장에서 자식을 전송하는 아버지를 그렸는데, 그 아버지의 우직하면서도 진솔한 부정(父情)을 끈끈하게 그렸다. 특히 기차가 떠날 때에사 자식에게 귤을 사주기 위해 철로를 건너 행상이 있는 난간을 기어오르느라 뚱뚱한 몸을 비비적거리던 그 뒷모습에 앵글을 맞춘 것은 몹시 감동적이었다.
그래서 중국은 해안의 동서를 막론하고 50년이 넘도록 그를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올렸거니와 우리 나라 국정 교과서에 번역으로 실린 지도 어느덧 사반 세기가 되었다.
더구나 그 작품과 나 사이에는 남다른 사연이 있었다. 1972년 여름, 아버님의 삼우제를 마치고 막 귀경한 나를 당시 창간을 준비하던 ‘수필문학’이 찾고 있었다. 중국의 명수필 한 편을 번역해 달라고. 나는 당장 그 『배영』을 번역했고, 그 번역물은 또 교육부 편수관의 눈에 띄어 교과서에 오르게 되었다.
올 봄, 그 대목을 강의할 때 또 한 번 주책을 부렸다. 난데없이 옛날 대학 시절에 겪은 한 토막 이야기가 튕겨나왔다.
긴 겨울방학을 마치고 귀경할 때 아버님은 무명 보자기로 우리 집 닭장에서 가장 토실토실한 암탉 한 마릴 싸 주시면서 담임교수 댁에 갖다드리라는 분부이셨다. 살아서 파드락거리는 그 넓다란 두 날개와 자그만치 근 반쯤 통통하게 살이 오른 몸통에 아기똥 한 뼘이 넘도록 야무진 두 다리의 암탉을 비록 새끼줄로 꽁꽁 묵었다지만, 꼬박 하룻밤 동안 만원 기차에서 그 저항을 어찌 견디란 말인가? 앞이 깜깜했다.
쌀 자루에 쌀 두 말, 작은 옹기에 된장 두어 보시기, 거기다 허드렛옷보퉁이 두 개, 웬만한 이삿짐이었다. 그것들을 끌며 지고 야간 급행에 올랐다. 때가 휴전 직후인지라 우리들의 철도는 걸핏하면 아비규환이었다. 오수에서 서울까지. 지금 고속버스로 네 시간이면 갈 거리를 그때 급행열차는 꼬박 여덟 시간 이상을 덜커덩거려야 했다.
우선 암탉의 안치가 골치였다. 생각다 못해 의자 밑 구멍에 두고, 그 의자에 앉은 손님들께 굽신굽신 절을 했다. 밤이 깊자 푸드득 푸드득 이녀석의 몸부림이 심했다. 거기다 낑낑 신음 소리가 간헐적으로 새어 나왔다. 철그락 철그락 쇠바퀴가 굴러가는 소리에 맞추어 암탉의 신음이 들릴 때 웬일인지 가슴이 퉁탕거렸다. 아닌게아니라 날벼락이 떨어졌다. 지나가던 여객전무가 닭 소릴 듣고, 누가 실었느냐고 벼락 같은 호통을 쳤다.
복도에 서 있던 나는 얼른 나섰다. 제가 실었다고. 차장의 눈동자는 금방 튀어나올 듯했다. 당장 닭을 내리라고, 아니면 다음 정거장에서 함께 내리라는 것이다. 나는 아무 영문도 모른 채 무작정 빌었다. 아버님의 심부름이요, 우리 선생님께 갖다드리는 길이라고.
그런데 웬일일까? 그토록 으름장을 놓던 여객전무가 스르르 비껴가면서 좌중은 한때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그 전무가 사라진 뒤 여객 중 누군가가 닭과 지네는 상극인데, 기차의 형상이 지네와 같아서 기차에는 닭을 싣지 않는다고 귀띔을 해주었다.
이렇게 한밤을 불안과 고통으로 새우고, 암탉은 아버님의 분부대로 우리 교수님 댁까지 송달되었다. 이른 아침, 선생님 댁이 있는 계동의 한옥 대문을 두들겼을 때, 선생님의 경이로운 표정과 사모님의 난감한 기색이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았다. 아닌게아니라 서울 복판의 주택가에 암탉이라니 신기할 법했지만, 그걸 기르자니 닭장이 없고 그걸 잡아서 먹자니 엄두가 나질 않았을 것이다.
나의 이야기는 여기서 그쳤지만, 강의실의 반응은 여느 때와 달랐다. 어쩌다가 옛날 고리타분한 이야기를 꺼내면 킥킥 웃음판이었는데, 그 날만큼은 뜻밖에도 숙연한 바람이 휙 스치는 느낌 때문에 나는 잠시 어리둥절했었다. 하기야 우리들 전쟁 세대와 지금 대학생 같은 신세대 사이의 세상을 보는 시각은 상당히 달랐다.
그런데 박군은 그 날 나의 옆길로 빠진 이야기를 집으로 들고 가서 그의 아버님께 갖다드렸고, 그 이야기는 끝내 그의 아버님 마음에 맴돌다가 닭 다섯 마리를 자개로 양각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70년 전 주차정의 아버지는 한국의 나를 울렸고, 40년 전 우리 아버님이 우리 선생님께 드린 암탉 한 마리는 올해 스승의 날, 뜻밖에 박군의 아버님 손끝에서 다섯 마리의 자개 닭으로 환생하여 박군의 선생 손에 돌아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