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뚝연기 날 즈음
임병식
저녁 무렵 굴뚝에서 피어난 연기는 왜 내게 정한의 모습으로 비쳐지는 것일까. 내 생각만도 아닌 것이 어느 작가는 나의 수필집 <아름다운 인연>를 읽고 자기만이 느낀 유년시절에 겪은 이야기를 어느 사이트에 올려놓기도 했다. 식량이 떨어져 친척집에 구하러 간 아버지가 돌아와 부엌에 불을 지핀 것을 보고서 이제는 밥을 먹겠구나 하고 솥뚜껑을 열어보니 맹물만 끓고 있었다는 것이다.
한데 나는 그 이야기를 읽으며 또 다른 상념에 젖게 된다. 수필집에 담아둔 내용 보다도 더 깊이 각인된 어떤 사연이 해질녘에 피어오르던 굴뚝 연기 속에 아직도 남아있는 것이다.
전에 발표한 ‘굴뚝연기’는 2000년 초에 수필집을 내면서 첫머리에 실었던 작품이다. 그것을 이번에 선집형태로 다시 펴내면서 재수록을 하게 되었다. 그 만큼 내 어린 날의 초상을 잘 드러내준 작품이라고 여긴 까닭이다.
이 작품은 굴뚝연기 속에 어머니에 대한 모정을 담아 놓은 것이다. 하지만 사이트에 올려놓은 그 작가는 굴뚝 연기 속에 아버지 이야기를 그려놓았다. 내용 또한 내 이야기와는 판이하다. 그런데도 그가 나의 작품을 읽고 글을 쓴 것은 ‘굴뚝 연기’라는 것에서 공감하는 게 있어 쓰게 됐으리란 짐작은 해볼 수가 있다.
그렇다면 굴뚝이나 굴뚝연기 자체가 어떤 상징성이나 마력이 있는 것일까, 그것은 모르겠다. 단지 여기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내가 이 작품을 쓰면서 어떤 이야기를 먼저 해야 써야할 것인가 고민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물론 시기적으로야 그때 쓴 이야기가 조금 앞서기는 하지만, 정작 가슴에 담아둔 이야기는 아직까지 밝히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은 작은 누나에 얽힌 이야기이다. 누나는 하루 아침에 갑자기 쓰러져 숨을 거두었다. 그야말로 눈 깜짝 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날은 숯 다리미질을 하다 쓰려져서 가스중독이 됐나 하고 동치미 국물을 먹여보려 했으나 이미 절명을 뒤여서 국물을 한수저도 목에 넘기게 해보지 못하였다.
지금도 시골은 그렇지만 그 당시 농촌은 저녁밥을 늦게 지었다. 들일이 끝나야만 들어와서 식사준비를 하기 때문이었다. 집집마다 저녁을 지은 연기가 굴뚝을 통해 피어오를라치면 이미 주위는 땅거미가 지기일쑤였다.
그런데 우리 집에선 그 시각이면 어머니가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지내서야 들어오시는 어머니에 앞서 항상 입소문이 먼저 풍문을 몰고왔다.
“느그 어므니 느그 누나 무덤에 가있는 것 같드라” 그런 말이 아니더라도 나중에는 알게 되는 일이었다. 옷매무새를 갖추고, 눈물 흘린 모습은 이미 어둠 속에 싸였지만 옷섶과 신발은 늘 황토흙이 묻어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돌아오지를 않은 어머니를 기다리다 말고 조바심이나 직접 마중을 나갔다. 누나 묘는 처녀가 죽으면 길옆에 묻어줘야 한다는 속설대로 뒷산 초입 길가에 있는데, 그곳 가까이 가니 어머니의 모습이 희끄무레하게 보였다. 이어서 가는 곡성이 들려왔다.
“에미는 어찌 살라고 니가 이렇게 갔느냐. 불쌍하고 불쌍한 것”
나는 바로 다가가지를 못했다. 아니 다가가지를 않았다. 적어도 감정을 수습하고 돌아설 시간을 드리고 싶었다. 대신 내가 더 섧게 울었다. 가만히 있는데도 눈물이 흘렀다.
어머니의 눈물은 어두워오는 땅꺼미에, 마을에서 피어 오른 밥 짓는 연기에 묻혀서 보이지 않았다.
그 격정의 세월 50년을 보내고도 나는 마음을 추스르지 못해 그 이야기를 아직 쓰지 못했는데, 그 작가는 이 글을 쓰도록 계기를 만들어 준 것이다. 그는 내가 자기의 글을 쓰게 만든 충동을 주었다지만 나를 또한 자극 한 것이다. 그러고 보면 굴뚝 연기 날 즈음의 기억은 내게 천상 아름다운 감상보다는 가슴 아픈 회억으로 이미지로 남아있을 수 밖에 없을 것이 틀림이 없다.(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