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7-17 (목) 12:00:00 박연실 수필가
줄을 그을 때는 연필을 사용한다. 연필심이 너무 뾰족하여 거슬리지 않고 그렇다고 너무 물러서 아랫줄까지 침범하지도 않는 적당히 뭉툭하고 부드럽게 그어지는 것이 좋다. 연필이 종이와 닿을 때 사각거리는 소리와 감촉을 즐긴다.나중에 다시 읽었을 때 왜 이 부분에 줄을 그었을까 하고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문장도 있다. 조사 한 글자에만 밑줄을 그어 놓기도 하고 서술어에만 줄을 진하게 그어 놓은 것도 있다.
김훈 작가는 소설 ‘칼의 노래’에서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한 문장을 두고 많은 고민을 했다고 한다. 작가는 처음에는 ‘꽃은 피었다’로 썼다가 담배 한 갑을 태우고 ‘꽃이 피었다’라고 적었다. 작가가 ‘은’이 ‘이’가 된 연유를 밝히길 ‘꽃이 피었다’는 사실의 세계를 진술한 언어이고 ‘꽃은 피었다’는 의견과 정서의 세계를 진술한 언어라고 밝혔다. 작가는 사실의 세계를 가지런히 밝히는 문장이 마음에 든다고 전했다.
최근에 읽은 문장 중 “여름은 빛나고 우리들의 사랑은 시든다”에 밑줄을 그었다. ‘은’ 과 ‘시든다’에는 진하게 한 번 더 줄을 쳤다. 작가의 마음을 따라가기도 하고 전혀 다른 감정을 대입해 보기도 하는 낱말 놀이를 하며 밑줄 긋는 호사를 누린다.
여름에도 우리들의 사랑은 추웠다, 여름이 오면 우리들의 사랑도 짙어질까, 여름도 빛나고 우리들의 사랑도 빛난다, 여름조차 빛나는데 우리들의 사랑은 저물어간다.
하찮게 생각했던 조사 하나만 바꿔도 감정의 농도와 밀도가 미묘하게 달리 느껴진다. 때로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되기도 한다. 자신의 몫을 충실히 해내는 결코 적지 않은 역할이다. 주연보다 한방이 있는 조연의 쓰임을 알게 되니 은밀한 세계를 알아차린 듯 뿌듯하다.
작고, 여리고, 놓쳐버린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무심코 지나쳤던 들꽃의 이쁨에 끌리고 무더운 여름 한 줄기 바람에도 감사하다. 소소하고 쓸데없어 보이는 것들도 결코 그렇지 않음을 지나온 삶이 보여주었다. 사소한 것에 기쁘고 하찮은 것에 서운하다. 우리의 마음도 ‘조사’만큼 작은 하나에 일렁이지 않는가.
<박연실 수필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