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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서면
나는 아직도 작은 짐승이로다.

인생은 항시 멀리
구름 뒤로 숨고

꿈결에도 아련한
피와 고기 때문에
나는 아직도
괴로운 짐승이로다.
(중략)
어두운 무덤을 헤매는 망령인 듯
가련한 거위와 같이

언젠가 한번은
들고 몰려오는 물결에 휩싸일

나는 눈물을 배우는 짐승이로다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서면.

 

 

 

 

부산의 책방에서 열린 낭독회에서 한 독자에게 질문을 받았다. 바다를 보면 어떤 기분이 드는지? 받고 나니 그 질문 자체가 망망대해. 그때 이 시가 떠올랐다. 바다 앞에 서면 내가 한없이 작아지는 기분이 들어 겸손해진다고 답했지만, 꾀죄죄한 대답 대신 조지훈의 이 시를 읽어드렸다면 좋았을 것 같다.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서면/나는 아직도 작은 짐승이로다”, 얼마나 근사한 대답인가. 아직 눈도 못 뜨고 귀도 열리지 않은 어린 짐승처럼 순하게 캄캄해진 기분이 든다고 답했더라면 좋았을 테다.

낭독회의 여운을 곱씹으며 광안리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바다 한가운데 펼쳐진 다리, 그 위를 크고 작은 자동차들이 흘러 다닌다. 다리 아래에는 누가 실수로 빛을 쏟은 듯 경이로운 윤슬! 이것이 빛더미구나. 빚더미 말고 빛더미! 멀리서 평생 빛의 움직임이나 좇으며 살았으면…. 그러다 “언젠가 한번은/손들고 몰려오는 물결에 휩싸일” 때를 만나면 파도보다 더 뒤척이며 울기도 하겠지만 말이다. 끝과 시작을 알 수 없기에 바다 앞에 서면 마음이 놓인다. 우리가 평생 “눈물을 배우는 짐승”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바다 앞에서 배울 수 있으니 좋지 않은가.

박연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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