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인의 숲 / 허은규 - 제3회 우하 박문하 문학상 최우수상

 

 

숨 가쁘게 정릉천을 달린다. 절정에 다다른 여름의 찌는 훈증 탓에 나무마다 걸쭉한 향내를 토한다. 삼계탕에 넣은 인삼과 황기가 우러나오듯 짙게 배인 나무껍질향이 호흡마다 들락거린다. 숲을 사랑하는 이유 중 하나는 건강한 냄새 때문이다. 눅진한 생풀의 날숨을 폐 속으로 들이다보면 왜 강아지가 수풀에다 코를 들이박고 좀처럼 떠나지 않는지 이해한다.

정릉천을 따라 3km쯤 가면 졸졸 흐르던 개천이 청계천과 합수한다. 다시 청계천을 따라서 3km쯤 내려가면 너른 중랑천을 만나고 중랑천은 한강으로 흘러든다. 천변을 따라 조성된 숲길은 발전하는 세월에 따라 새롭고 청신해졌다. 통행로는 매끈히 포장되고 물길은 정비되며 나무도 단정해졌다. 그럴수록 초록이 다스리는 영토는 넓어졌다. 나무를 깊이 알지 못하는 이도 곧 잘 분별하는 벚꽃나무와 매실나무, 버들나무와 조팝나무가 곳곳에 눈에 띈다. 갈대와 억새가 무성한 강변 새새에는 환삼덩굴이나 박주가리 같은 식물이 초록을 덧칠한다.

중랑천에 갔다가 길을 되짚어오면 이미 날이 어두워 깜깜한 숲을 걸을 때가 있다. 어떤 날에는 일부러 한밤중에 길을 나서서 도심 속의 어둔 강변을 걸어보곤 한다. 깜장과 연두가 혼색된 나무의 색다른 모습을 엿보는 건 소소한 재미이고 온전히 밤의 평안을 독차지한 뿌듯함이 크다. 콧속으로 들이치는 안개를 마시며 순전한 침묵과 대면하는 건 아직 잠들지 못한 자의 특권이다.

밤의 숲과 관련해서 작은 기억이 있다. 꽤나 오래 전인 2003년의 봄, 대학을 다닐 때였다. 밤까지 도서관에서 전공 책을 들여다보다 머리가 지끈거려서 개운산에 올랐을 때, 맹인 한 분이 앞에서 지팡이를 두드리며 걷고 있었다. 연세는 오십쯤 되어 보였고 깡마른데다 검은색 모자를 눌러썼다. 똑똑, 땅의 대답을 묻듯 쉴 새 없이 지팡이를 타전했다. 한동안 앞서 걷던 그는 산책로 곁에 선 작은 정자로 들어선다. 지켜보니 같은 처지의 분들이 모여서 모임을 갖고 있었다. 근황도 나누고 정보도 교환하는 회합이다. 끝없이 노크하듯 땅을 두드리는 지팡이 소리는 이상하게도 경쾌했다. 숲속의 만남 또한 고성과 웃음이 오가는 사뭇 즐거운 분위기였다.

돌아서서 밤의 숲을 따라 걷다가 그분들이 왜 도심의 카페나 운동장을 내버려두고 산꼭대기에서 모임을 갖는지 이해했다. 걷는 동안 운동도 되는데다 숲은 보이지 않는 이들에게도 안온하고 아름다운 공간이었기 때문이었다.

어둠이 시야를 차단할 때 일시적으로 오감 중 후각, 미각, 청각, 촉각만이 예민해진다. 시각이 차단되는 건 사람에게 어둠이 낯설게 느껴지는 이유이며 밤마다 사람들이 색다른 체험을 할 수 있는 원인일 것이다. 물론 낮에 눈으로 즐기는 나무와 풀도 아름답다. 아침이면 이슬과 서리에 꼽꼽하게 목욕한 풀더미가 햇살의 건조에 발맞춰 서서히 기립한다. 촘촘하게 심긴 은행나무는 도시의 성자처럼 남루한 회색나무 옷을 입은 채 묵묵히 제 할 일을 감당하고 있다. 한여름에 숲 사이를 걷다보면 한증막에 들어온 듯 폐 속으로 더운 풀냄새가 들이치며 턱턱 숨이 막힌다. 푸른 엽록소의 샤워였다.

 

반면 어둠이 내린 도시 속 반듯하게 포장된 숲은 고아하다. 암흑에 초록빛깔을 몽땅 빼앗긴 밤의 숲일지라도 낮과 다름없이 빛나고 반짝거리고 있었다. 밤에 걸어가는 숲이란 흡사 어둠을 두드리며 걷는 ‘맹인의 숲’과 같다. 잠 대신 산책을 택한 행인은 모두가 일정한 시간동안 시야를 닫고 검은 숲의 내장을 통과한다. 똑똑, 타전하듯 감각의 지팡이가 바닥을 두드리고, 시각 이외의 다른 감각이 읽어내는 숲의 이야기를 듣고, 맡고, 느끼기 시작한다.

숲은 시각이 아니라도 즐기고 사랑할 수 있다. 코로 쏟아져 들어오는 꽃의 향기, 귀로 들이부어지는 밤벌레의 새록새록 우는 소리, 피부에 시원하게 와 닿는 산림의 촉촉한 숨결까지, 비로소 숲의 이면을 본다. 환한 낮보다 찬란하고 생기 있는 모습이다.

나무도 밤에는 잠을 잔다고 한다. 그들의 잠이란 광합성을 멈추는 대신 호흡만 조용히 반복하는 활동이다. 밤이면 숲은 더 격렬하게 호흡을 내뱉고 들이마신다. 나무가 내뿜는 게 탄소인지 산소인지는 모른다. 그것이 무엇이든 사람에게 해로울 리 없다는 믿음이 있다. 풍뎅이의 암청색 껍질 같은 하늘의 박모 아래에서 나무가 이룩한 식생의 품속을 숫제 안기듯이 지난다. 동물들이 껴안고 체온을 나누듯 숲은 행인을 품고 평화를 적선한다.

흔히 숲의 이로운 점을 설명하며 온도를 낮춘다거나 소음을 줄이고 공기를 정화한다는 이유를 꼽는다. 모두가 온당한 이유지만 눈이 감기듯 농밀한 어둠 속을 걷다보면 도시의 숲이 품은 가장 큰 매력을 발견한다. 평온이었다. 걷는 동안 신경을 휴면할 수 있는 온전한 ‘방심’과 ‘태만’이었다. 나무와 수풀은 장승처럼 도열하여 차와 오토바이 같은 위험한 쇳덩어리들의 출입을 가로막았고 소란스런 새들도 잠시 입을 다문다. 밤에 숲을 걸어보는 것은 침대 위에서 취하는 휴식을 걸으면서 취하는 형국이다. 종일 신경을 옭죄던 긴장과 예민함, 습관적인 두리번거림도 버려둔다. 집 안에 있다가도 답답하다며 숲으로 나서는 걸 보면 집보다도 더 편한 공간인 모양이다.

늙은 숲과 나무들이 발자국만으로 행인을 알아보고 언제나 반긴다. 어둠이 덮이면 나무든 바위든 형상의 윤곽들은 하나로 합쳐지며 거대한 군체가 된다. 낮에는 숲의 하늘도, 황토도, 잎사귀의 흰빛, 갈빛은 ‘동사’처럼 펄펄 날뛰었지만 저녁을 지나는 동안 아름다운 ‘형용사’가 되고, 밤에는 얌전한 ‘여성형 명사’가 되어 한 곳에 고인다.

그것이 존재할 수 없는 곳에 존재할 때 아름답다. 전쟁 가운데 사랑이라던가, 반목 끝의 화해가 그렇다. 손쉽게 맞닥뜨리는 평화, 가까이에 놓인 방만, 이런 장점이 무성한 도시 숲은 평안이 귀한 곳에 존재하기에 더욱 가치 있었다. 쉼이 고픈 이들마다 나무의 냄새와 맨살 스적이는 바람의 촉각, 침엽과 활엽들이 사락거리는 소리를 듣고 느낀다. 역설적으로 시야가 닫히고 눈이 온전히 멀게 되자 숲의 조요한 내면에 환히 눈을 뜨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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