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림, 스며들다 / 김정화 - 제9회 투데이신문 직장인 신춘문예 당선작

 

 

양홍에 수감을 섞어 붓끝에 찍는다. 소복한 꽃잎 안쪽, 검붉은 물감이 미리 내놓은 물길을 따라 번진다. 적당한 수분을 머금은 바림붓이 부드럽고 섬세한 움직임으로 물감의 번짐을 돕는다. 서서히 농도를 달리한 색들이 꽃잎에 스민다.

온 세상을 집어삼킨 코로나바이러스는 병상에 누운 어머니의 의지를 꺾어버렸다. 면회가 금지되고 주말마다 찾아오던 자식들을 보지 못하게 되자 시름시름 앓다 급기야 식사를 거부했다. 자식들에게 부담 주기 싫다고 스스로 요양병원 입원을 결정할 정도로 강단 있던 분이었다. 영양주사를 투여하며 적절한 조치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면회는 여전히 불가능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홀로 계신 시어머니가 마당으로 나뒹굴어 다쳤다는 연락이 왔다. 얼굴이 긁히고, 정강이는 살갗이 벗겨져 피가 엉겼다. 온몸에 타박상을 입어 몸살을 앓았다. 연로해서 종종걸음으로 발을 끌다시피 하더니 한 뼘도 되지 않는 문턱에 걸려 엎어진 모양이었다. 주변의 우려가 있었지만, 아흔이 넘은 어머니들의 상황을 고려해 퇴직을 결정했다. 서둘러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집 근처에 빌라를 마련하여 어머니들을 모셨다.

어설프긴 해도 혼자서 자족했던 시어머니는 이사를 오자 다른 모습을 보였다. 며느리를 수하 부리듯 하는 꼬장꼬장한 옛 시어머니 모습을 드러냈다. 낯선 환경에 적응하기 힘들어 그런 건가 했는데 가만히 보니 시어머니 유세였다. 체면을 내세우면서도 집주인 행세를 하면서 친정어머니를 손님 취급했다. 매사에 주도권을 가지려 했으며,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말하고 행동했다. 원만한 합가를 위해 대화를 시도했으나 철옹성이었다.

친정어머니도 질세라, 경계를 확실히 하면서 사돈이 원하는 겸상을 거절했다. 젓가락 사용이 힘들어 손으로 반찬을 집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싫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우위를 점하려는 시어머니의 속내를 감지한 듯 여지를 주지 않았다. 걷지 못하는 친정어머니는 자신의 영역에 울타리를 치고 적당한 거리를 두었다. 가끔 방문 앞을 기웃거리는 사돈을 향해 잠깐 손을 흔들어 주는 게 고작이었다. 그나마도 시어머니는 ‘가라’는 뜻으로 받아들여 서운하게 생각했다.

서로를 배려하는 타협은 불가능한 듯 보였다. 평생을 다른 환경, 다른 가치관으로 살아온 어머니들이다. 자식을 나누면서 사돈지간이 되었지만 교류는 없었다. 매사에 자신만의 방식을 고집하면서 상대방의 일상에도 관여하려는 시어머니와 오롯이 자신을 지키려는 친정어머니 사이에, 이제는 모든 걸 내려놓고 자식에게 의지하기를 바라는 내가 끼었다. 얼마간의 탐색전이 끝나자 갈등은 점점 깊어갔다.

오후에 다른 대상자 한 분을 더 보살피고 있었기에 어머니들의 갈등은 나를 더욱 힘들게 했다. 마음속 번뇌를 다스리는 데 도움이 될 거라며 친구가 함께 민화 그리기를 청했다. 화구를 펼치니 방안 가득 묵향이 퍼졌다. 답답하던 숨통이 열리는 듯했다. 가느다란 선을 그어 도안을 완성했다. 그윽한 먹 내음에 마음이 안정되고 숨죽인 붓질에 온 정신이 모였다. 종이를 마르고, 도안을 그리고, 그 위에 물감을 얹는 과정을 통해 그림은 완성된다. 과정과 과정 사이에 충분한 기다림이 있고, 어느 한 과정이라도 어긋나면 낙관의 순간을 얻을 수 없다.

붉은 물감에 군청색을 살짝 찍어 더하자 물감은 검붉게 변했다. 빨간 바탕의 꽃잎 안쪽에 물을 바르고 검붉은 물감을 선 안쪽에 얹었다. 물길을 따라 자연스러운 번짐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그림에 입체감을 주기 위한 바림은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붓질을 반복하다 보니 종이가 닳아 구멍이 날 지경이었다. 꽃 한 송이를 붙잡고 진땀을 흘렸다. 바림은 부단한 노력과 인내와 기다림이었다. 거기에 미리 안배된 물의 양이나 붓을 다루는 섬세함, 번져가야 할 방향을 제대로 맞추는 작업이 필요했다.

한밤중, 전화벨 소리에 깜짝 놀라 일어났다. 집에 도둑이 든 것 같으니 빨리 건너오라는 시어머니 전화였다. 놀란 마음에 잠옷 바람으로 외투만 걸치고 뛰어갔다. 현관을 열자 두 어머니는 지팡이를 하나씩 들고 서로를 의지한 채 욕실 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두려움과 긴장감이 가득한 표정으로, 도둑을 욕실로 몰아넣었으니 빨리 잡으라고 성화였다. 사돈이 자는 방에 도둑이 침범하려는 걸 보고 어머니는 지팡이를 휘두르며 뛰어들었다. 혼자서는 한 걸음도 떼지 못하는 상태였는데, 거실을 가로질러 사돈 방까지 무슨 수로 이동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까닥하면 꽃잎이 시커멓게 변할 태세였다. 물을 더해 조심스레 물감을 걷어냈다. 종이가 상할까 봐 가슴이 조렸다. 마르기를 기다렸다가 물을 더하고 다시 조심스레 물감을 올렸다. 스며들 듯 번져가는 붉은빛에 꽃잎은 조금씩 생기가 돌았다. 한 지붕 아래 산다고 하루아침에 온전한 가족이 될 수는 없다. 아무리 바빠도 바늘허리에 실을 꿸 수는 없지 않은가. 백 년 가까운 세월을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온 어머니들이 아닌가. 상대방에 대한 애정과 충분한 이해가 시나브로 스며들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친정어머니의 증상은 섬망이었다. 어지럼증으로 처방받은 약이 문제가 된 것 같았다. 정신이 혼미한 중에도 사돈을 구하기 위해 불가사의한 힘을 낸 것이다. 경계하고 외면하면서도 마음을 닫은 것은 아니었나 보았다. 그 뒤로 바람이 찬 날이면 시어머니는 말없이 사돈 방문을 닫아주고, 더운 날이면 선풍기 바람을 넣어주기도 했다. 두 색의 물감이 한지에 스며들어 또 다른 색을 만들 듯, 두 어머니의 마음도 서로를 향해 천천히 열리기 시작한 것일까.

자정이 지날 무렵, 모란 꽃송이가 피기 시작했다. 무수한 시행착오를 겪고서야 제대로 바림된 꽃잎이다. 힘없이 널브러졌던 잎들이 꽃대와 연결되어 복스러운 꽃송이를 만들었다. 깊이 스며들어 그늘을 만들고 밖으로 이어져 바람에 하늘거리는 듯하다. 단단히 목질화된 가지가 꽃대를 다잡고 넓적한 이파리는 꽃송이를 떠받친다. 삼경이 지난 깊은 어둠 속으로 은은한 모란 향기가 번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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