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의 존재감/ 이현숙
외부에서 오는 다양한 자극을 받으며 산다. 우리 집은 큰길가 코너라 분주한 소리로 아침이 열린다. 건너편 학교로 향하는 학생이 왁자지껄 나누는 아침 인사와 학부모 차가 꼬리를 물고 늘어서며 내는 소리가 활기차게 창을 흔든다. 오후에는 ‘빵빵’ 경적을 울리며 “타마레스~, 참뽀라도!”를 외치는 히스패닉 여인의 걸걸하고 끝자락이 갈라진 목소리가 담을 넘는다. 오늘 몇 번을 외쳐야 밀차에 준비해온 음식을 다 팔 수 있을까. 생계를 위한 애잔함에 가슴이 찡하다. 한여름에도 계절 감각을 잃은 ‘루돌프 사슴코’로 아이들을 부르는 아이스크림 트럭은 이 골목 저 골목 기웃거린다. 동심을 자극하는 소리가 정겹다.
세 블록 떨어진 알폰소 성당에서 ‘티잉~팅~’ 울리는 종소리는 은혜롭다. 마음속에 깊은 진동으로 퍼지며 잘못한 일은 없는지, 감사함 없이 하루를 보낸 것은 아닌지 묵상하게 한다. 요즘도 종지기가 종을 치는지 성당에 가서 물어볼까 하는 호기심이 일지만, 꾹 참는다. 혹시 모를 종지기에 대한 환상을 깨고 싶지 않아서다.
어제는 강한 바람이 온종일 불었다. 나뭇잎들이 서로 부딪치며 내는 소리와 팔랑이는 몸짓이 잘 어울려 멍하니 바라봤다. 키다리 야자수 나무의 커다란 잎사귀는 견디기 힘들었는지 ‘부지직 뚝’ 하며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뿐인가. 집 안에는 ‘윙’하며 돌아가는 냉장고와 주전자의 보글보글 물 끓는 소리가 편안함을 준다. 뻐꾸기시계는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매시간 문을 밀고 튀어나온다. 뒷집에서 들려오는 마리아치 밴드의 흥겨운 리듬은 나도 모르게 발장단을 치게 한다.
몇 년 전 중환자 병상에 누웠을 때다. 한쪽 팔에 매달린 혈압계가 지속해서 뱉어내는 ‘피시식’ 작은 공기의 흔들림이 나에게 말을 건냈다. “내 소리가 들리나요? 그럼, 당신은 살아있습니다.” 울컥 치밀던 반가운 소리였다. “그래, 혼자가 아니었구나.”라며 의지가 됐던 기억이 생생하다.
‘탁탁’. 컴퓨터 자판기 두드리는 소리는 나를 자극한다.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징징거리고, 떠오른 생각을 잊히기 전에 얼른 옮기지 않는다고 보챈다. 자석에 끌리듯 나도 모르게 손가락으로 툭툭 맞장구를 친다. 요즘은 중독된 듯 하루라도 가까이하지 않으면 죄책감까지 든다. 가끔 변심한 듯 연필로 종이 위를 사각사각 채우고 쓱쓱 싹싹 지우개로 지우며 벗어나려 하지만, 결국 컴퓨터로 옮기는 작업을 해야 하니 우리는 벗어날 수 없는 굴레이자 애증 관계다. ‘탁탁’. 지금도 그 소리는 나와 함께 희망과 길을 담는다.
듣는 귀가 복이 있다고 했다. 일상의 소리에는 삶이 담겨 있기에 살아있다는 울림이다. 상대에게 무심히 전달하고 자신의 의무를 다했다며 스치고 지나는 소리는 우리가 얻는 특혜다. 그 안에서 소통하고 공감하며, 이해하고 수용해 서로 익숙해지는 것이다. 소리를 지각한다는 것은 청각적인 능력 그 이상의 의미다. 나에게 다가오는 모든 소리는 내가 살아있기에 존재한다. 그저 자신의 위치에서 해야 할 일, 잘하는 일을 묵묵히 해내며 함께 가는 거다.
.시끄럽거나 혹은 울퉁불퉁하거나, 부드럽거나.
오늘도 나에게 다가오는 소리와 함께 세상 속을 거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