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지팡이/이현숙

 

 

아버지의 묘지에 왔다. 앞서서 걷는 남편이 지팡이에 의지해 걷는데 한쪽 어깨가 기울였다. 지난해 코로나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병원에 입원했던 이후로 몸이 많이 약해졌다. 울퉁불퉁한 잔디 위에서 몸의 중심을 잡느라 등이 뒤로 당겨지며 머리는 앞으로 반 박자 앞섰다. 저 사람의 나이쯤이었을까. 그의 뒷모습에 아버지가 보였다.

어릴 적 아버지는 나에게 큰 산이었다. 어디서나 사람들이 모이는 곳의 중심에는 아버지가 계셨다. 동네 행사가 있을 때면 항상 연단에 앉아 있거나 마이크를 잡고 연설을 하셨다. 칠 남매가 두 살 터울이라 초등학교의 육성회장은 장기집권하며 자식들 기 살리는 데 앞장섰던 분이다. 남매끼리 서로 아옹다옹 다투면 엄마의 마지막 경고는아버지에게 말씀드린다.”였다. 엄마에게 등 한두 대 맞는 게 편하지 아버지 앞에 무릎 꿇고 앉아서 한 시간 넘게 듣는 훈계는 차라리 고문이기에 우리는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툭툭 털고

30년이 지난 일이다. 꿈을 갖고 미국에 와서 자리를 잡아가는 자식을 보러 오셨다. 당시 중풍으로 몸의 반쪽이 부자유스러워 지팡이를 짚었지만, 그랜드캐니언에 가서도 다른 사람 보다 앞장서서 걷고 맨 마지막에 관광버스 오를 정도였다. 일을 마치고 집에 오면 영어를 못하는데도 집 앞의 맥도날드에 가서 빅맥 햄버거를 사 먹었다며 자랑했다. 약해진 모습을 자식에게 보이기 싫어서 스스로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이려 더욱 애를 쓰셨는지도 모른다.

그날이 오기 전까지 우리는 미국에서 뿌리를 내린 자랑스러운 자식들이고, 아버지는 변함없이 든든한 대들보이자 지붕이었다. 1992429. ‘로드니 킹 구타 사건과 한인 상점에서 흑인 소녀를 주인이 살해한두순자 사건이 맞물리며 폭동이 일어났다. 헬리콥터에서 생중계하는 TV를 통해 주유소와 가게 약탈이 방송되고, 순식간에 LA 한인타운을 비롯한 도시 대부분이 폭도들에게 약탈당하는 폭동이 일어났다. 한인타운은 백인 거주지와 흑인 거주지 사이에 있었기에 인종폭동의 피해를 흡수할 완충지대로 심각한 피해를 보았다.

당시 언니는 슬라우슨 스와밋에 여성 옷가게를 인수한 지 일주일 됐다. 며칠 후면 다가올어머니날의 대목을 보기 위해 물건을 꽉 채워놓았다. 그날은 마침 상점이 정기 휴일이라 내일이면 붙일 신장개업(Grand Opening)이라는 포스터를 쓰며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런데 TV 도시가 활활 불에 타고 한인 라디오에서는 리포터가 울먹이며 소리를 질렀다. “한인의 다수가 운영하는 슬라우슨 스와밋이 불에 타고 있습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도 믿어지지 않아서 언니는 얼이 나가 말을 잃었다. 오빠는 엘에이 다운타운에 상점과 창고가 있는 액세서리 수입업을 했다. 폭도들이 밀고 들어와 겨우 몸만 빠져나왔다며 넋이 나간 채 집으로 돌아왔다. 히스패닉 동네에서 마켓을 하던 나는 가게 문을 닫고 그 안에서 야구방망이를 들고 밤을 지냈다.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나니 언니의 가게가 있던 자리는 기둥만 남아 연기를 풀풀 날리고 오빠의 가게와 창고는 상자 하나 남김없이 싹 쓸어갔다. 자식들은 그동안의 피땀 흘린 노력이 타인에 의해 부서져 버려 넋을 놓고 있었다. 그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던 아버지는 그나마 손에 수족처럼 들고 있던 지팡이를 놓아버렸다. 쓰러졌다. 무너졌다. 자식을 지켜 주지 못한 자신에 향한 질책이듯 손가락 하나 의지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오빠와 언니는 엎친 데 덮친 불행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나쁜 일은 겹쳐서 온다더니 정말 그런가 보다.

우리 가족의 삶은 그 시간부터 엉켰다. 아버지는 눈을 껌뻑이는 움직임으로 의사 표현을 할 정도로 몸의 모든 기능이 멈추었다. 엄마는 병시중으로 하루에 하루를 곱하며 지쳐갔다. 서울에서 큰오빠가 아버지를 모셔 가려고 왔다. 담당 의사는 현재의 건강상태로 장거리 여행을 보장할 수 없다고 했다. 항공사 측에서는 만약을 대비해 의사나 간호사의 동행을 그리고 김포공항에 구급차를 대기시켜야 한다는 조건을 걸었다. 이래도 저래도, 방법이 없었다. 주위 여건은 아버지를 이곳에 붙들어 눕혔다.

개업식에 부모님을 모셔 자랑하려던 언니는 자신의 팔자 탓을 하며 점점 늪으로 가라앉았고, 동분서주하며 발버둥 치는 오빠는 맨땅에 헤딩하듯 자꾸 엎어졌다. 경제적인 압박과 정신적인 눌림 속에서 누구를 탓하고 원망해야 하기보다는 당장 발등의 불이 뜨거웠다. 미국 사법당국과 지역 언론들은 무자비한 경찰과 빈부격차, 인종차별 등 미국 사회의 근본문제보다는 한흑(韓黑)갈등에 초점을 맞춤으로 한인들이 입은 정신적 상처는 물질적 피해 못지않게 컸다. 우리 가족도 그 중심에 서서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 격이었다.

폭동이 휩쓸고 지나간 폐허 속에서 다시 일어서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라떼(나 때는 말이야)’를 앞세우며 자영업에 대한 꿈을 버리고 못 하고 다운타운 언저리를 맴돌던 오빠는 이제 한 의류업체의 경비원에서 매니저로 승진해 월급을 받으며 만족해한다. 옷가게로 한몫 챙기려던 언니는 작은 식당을 꾸려 보다 잘 안되어 미용 기술을 배운다더니 이제 작은 가게에서 일한다. 사장보다 직원이 스트레스 덜 받고 편하다고 했다. 아버지는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자식도 이름한 번 제대로 부르지 못한 채 5년을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상태에 계시다 선산이 아닌 낯선 땅에 묻혔다.

그때 그 시간, 그 자리에 있었기에 겪어야 했던 시대적 폭풍이고 아픔이었다. 3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다가 위태위태하게 넘어갔다. 요즘은 코로나바이러스로 펜데믹을 겪으며 아시안에 대한 테러가 곳곳에서 벌어진다. 어처구니없는 구실을 핑계로 괜한 분풀이를 엉뚱한 방향으로 풀려고 한다. 형태만 변했지 인종 간의 문제는 없어지지 않고 우리 가까이에 머무니 아마도 벗어날 수 없는 짐일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묘지에 올 때마다 생각한다. 엘에이 폭동을 겪지 않았다면 선산의 할아버지 곁에서, 때맞춰 친지들에게 제사상을 받았을 텐데 낯선 땅에서 다른 풍습에 제대로 대우를 못 받으니 섭섭하지 않을까. 고향의 흙냄새가 그립지 않을까. 남의 땅에서 상관없는 일에 휘말려 삶을 마감하신 것이 억울하지 않을까.

 

고통 속에 가신 것이 안타깝다. 엘에이 폭동 이야기가 나오면 아버지가 그립고 보고 싶다. 지치고 외로운 그림자가 발뒤꿈치를 질질 따르는 걸 그때는 왜 못 느꼈을까. 그래도 어려울 때 부모님이 옆에 계셔서, 지팡이 삼아 우리가 다시 일어섰다. 가끔 묘지를 찾아와 사는 이야기도 하고 지친 마음을 달래며 재충전의 시간을 갖는다. 지팡이에 의지해 걷던 아버지의 뒷모습이 떠오른다. 아직도 내가 의지하고 기대며 쉴 수 있는 넉넉한 등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