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숲속 미술관서 만난 '작은 거인'

이현숙 / 수필가
이현숙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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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중앙일보] 발행 2021/08/24 미주판 21면 입력 2021/08/23 19:00 수정 2021/08/23 21:11

생각하지도 못한 곳에서 만난 그녀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재작년에 캐나다의 토론토에 갔다가 맥마이클 미술관에 들렀다. 숲속이라 산책하면서 조각상을 구경할 수 있는 한적한 곳이다. 그곳 인디언들이 섬세하고 아기자기한 공예품을 보고 다음 전시장으로 들어섰다. 엉거주춤 서서 어색한 미소를 띤 여인의 입간판이 세워져 있었다. 모드 루이스다. 혹시나 하고 둘러보니 전시된 작품 안에 무지갯빛의 밝은 색이 물결쳤다. 그녀가 맞다. 자신이 살았던 캐나다 남동쪽의 노바스코샤라는 작은 어촌 마을을 화폭에 담은 ‘나이브’ 화가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나이브(naive) 화가란 정규 미술 교육을 받지 않은 채 기존의 양식에 구애 받지 않고 자연을 소박하고 섬세하게 담아내는 예술가를 말한다.

몇 년 전 모드의 삶을 다룬 에이슬링 월시 감독의 영화 ‘마우디(Maudie-한국 영화명은 ‘내 사랑’)’를 보고 감동을 받았는데 이곳에서 그녀의 작품을 만났다. 투박하고 거친 남자와 몸은 자유롭지 못하지만, 아름다운 사랑을 꿈꾸는 여자. 영화는 두 사람의 어설프고 삐걱거리는 운명 같은 사랑을 무심한 듯 툭툭, 그러나 섬세한 솜씨로 풀어냈다.

모드는 어릴 적부터 앓아온 류머티즘 관절염으로 다리를 절었다. 부모가 사망 후 가족에게 버림 받고 자립하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생선을 파는 에버렛 루이스가 가정부를 찾는다는 광고를 보고 그의 집으로 들어갔다. 모드는 가정부로 일하며 구박을 받으면서도 에버렛의 집을 도화지 삼아 그림을 그렸다. 벽이며 계단과 빈 깡통 등 빈틈이 보이면 붓 하나로 수선화와 나비로 장식했고, 창틀에 그려진 새는 그녀의 말동무가 되어 주었다.

길가에 자리한 초라한 오두막집을 아름다운 그림으로 가득 채워 넣어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길을 멈추게 했다. 어린아이의 그림처럼 기교를 부리지 않는 순수함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림자 없이 강렬한 색으로 가득한 모드의 그림은 점점 유명해져 부통령 리처드 닉슨까지 살 정도였다. 나이가 들며 기형이 심해져 등이 굽고, 손과 팔이 비틀려 붓을 쥐는 것조차 힘들어 고생하다가 한 켤레의 낡은 양말처럼 살자던 남편의 품에서 숨졌다.
 
가난했지만,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았고 어떤 순간에도 행복을 놓지 않았다. 자신의 삶을 주도하며 산 용감한 여인이다.

그녀는 어떤 마음으로 그림을 그렸을까. 몸이 불편해 자유롭게 다닐 수 없기에 작은 오두막 안에서 창밖의 세상인 마을 언덕, 바다와 동물 등 일상을 종이나 과자 상자에 자신의 꿈을 표현했다. 눈길을 달리고 싶고, 아름다운 꽃으로 자신의 일그러진 얼굴을 가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갈매기 되어 훨훨 날고 마차를 타고 마을의 교회에 갈 수 있다면 하는 바람이었을 것이다. 그녀가 그린 소의 다리가 세 개면 어떻고 겨울 눈 속에 단풍나무가 있다면 또 누가 뭐랄까. 사슴이 달리는지 누워 있는지 분명치 않다고 고개를 갸우뚱할 이유가 없다. 그녀 마음 가는 대로 그린 것이니까. 어린아이답게 그려낸 것은 부모와 함께 행복했던 어린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아닐까. 그때로 회귀하고 싶은 발버둥은 아닐지.

불평이나 원망을 마음에 담아두지 않는 그녀의 성격이, 밝게 표현해낸 그녀의 마음이 전달되어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몸이 불편하고 뭐 하나 내세울 것 없는 그녀지만, 자신이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린다는 작가의 자존심은 당당했다. 그녀를 닮고 싶다. 아니 예술가의 그 자세를 배우련다. 작은 숲속에 있는 미술관에서 위대한 거인을 만났다. 모드 루이스의 화보집을 가슴에 품고 박물관을 나와서 차로 향하는데 바람이 귓가를 스치며 인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