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마지막 소망
바람결처럼 스치며 마음에 그려지는 그림도 잠재의식 속에 가라앉은 소망일 수 있을까?.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르고 안정된 후에 이런 의문이 들었다. 동물도 죽을 때는 고향 쪽으로 머리를 돌린다는데 아버지는 이곳 미국 땅에 묻히고 싶어 하셨다.
여행 목적 오셨을 때였다. 마침 아는 분의 장례식이 있어 참석하시고는 그 절차에 반하셨다. 한국에서의 장례와 비교하면 가격도 저렴하고 깔끔한 처리에다 편리하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연세가 드신 분들은 삶을 정리해야 하는 시기라 생각해서인지 그런 과정들을 그냥 봐 넘기시지 않는가 보다. 마지막 가시는 길이 자식들에게 짐이 되지 않으면서도 초라하지 않기를 바라는 심정이 아니셨을까.
한국에서는 절차와 형식이 간소화되었다고 하지만 아직도 전통을 중요시해 여간 부담이 되는 것이 아니다. 거기다 얄팍한 상술이 얹히고, 인부들과의 은근한 밀고 당기기, 며칠 밤낮으로 이어지는 손님 접대에 경제적인 것뿐 아니라 정신적 육체적으로 지치게 마련이다. 망자에 대한 그리움을 되새기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을 위로받아야 할 가족들에게 모든 절차는 버겁기까지 하다.
장례를 효의 연장으로 보기에 자식의 입장에서는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한다. 그 심정을 노려 과정을 따지거나 간소하게 하려면 불효자로 몰리기 십상이라 울며 겨자 먹기로 끌려가다 없는 살림에 빚까지 얻게 된단다. 미국에서는 이런 형식에 치우치지 않는 편이라 허례허식이 배제되고 형편에 맞춘다.
묏자리도 생전에 본인이나 자식들이 미리 가족 단위로 결정해 놓는 경우가 많고 특히 한인사회에서는 상조회가 있어 노인끼리 서로 저축하는 셈 치고 회원들에게 일이 생겼을 때 정기적으로 돈을 낸다. 결국 본인의 장례 시에 목돈이 지급되니 마지막 가시는 길에 자식 등에게 짐이 되지 않게 미리 예비를 하는 것이다. 또한 전문 장례 설계사가 있어 보험도 들고, 모든 절차를 미리 결정을 한단다.
이런 일련의 절차들이 마치 자식이 부모님 돌아가시길 기다린다는 느낌이 들어 미국식 장례 문화가 낯설고 민망했는데 지나고 보니 장점도 많았다. 할부로 부담 없이 낼 수 있고, 일을 당한 후 허둥대지 않아도 되었다. 한곳에 묫자리를 몇 부지 준비해 놓으면 옆자리에 가족과 있을 수 있다는 것도 심리적으로 사후에도 외롭지 않으리라. 죽은 사람의 지위 고하와 재산 정도에 관계없이 비석도 비슷한 크기요, 묘비명도 가족 명의로 간단히 새기기에 더 부담이 없고 편안하다. 생전에 이름 앞에 붙었던 모든 수식어를 다 떼어내고 한 사람의 자연인으로 남겨지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미국여행을 즐기시던 중 4․29폭동이 터졌다. 언니가 새로 여성복 가게를 낸 지 일주일 만에 흑인 동네에 있던 스와밑은 폭도들에 의해 불길에 휩싸여 흉측한 몰골로 남겨졌다. 다운타운에서 액세서리 수입상을 하던 작은 오빠의 상점도 모두 털렸다. 갑자기 닥친 불행에 평소 혈압이 높던 아버지는 충격으로 쓰러지시곤 결국 일어나시지 못했다.
한국으로 모셔 가려고 큰오빠가 왔다. 절차도 복잡하고 비용도 만만치 않았지만 아버지의 체력이 오랜 비행을 견뎌 내실지도 의문이었다. 의식은 또렷하셨기에 가시자는 큰오빠의 제의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이곳에 계시겠다는 의사 표현을 확실히 하셨다. 아버지의 마음을 읽으신 엄마가 본인의 의견을 따르자고 하셔서 오빠는 울면서 포기를 했고 만약을 대비해 로즈 힐에 묘지를 장만해 두었다.
그 후 몇 번의 고비를 넘기며 4년이라는 긴 시간을 고통 속에서 살아내셨다. 긴 병에 효자 없다더니 애처롭던 마음도 차차 접히고, 오히려 병시중에 지쳐 부쩍 늙으신 엄마를 더 안쓰러워할 때쯤 아버지는 그나마 눈을 껌뻑이는 것으로나마 희미하게 잡고 계셨던 삶의 끈을 놓아 버리셨다.
항상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정작 돌아가시니 그동안 무심했던 것이 후회되었다. 서로 고생하느니 차라리 가시는 것이 아버지도 편하시리라 생각했던 속내가 죄스러웠다. 평소에 좋아하시던 양복을 입고 곱게 분단장을 하신 채 장미꽃다발에 싸여 누워 계신 아버지는 생전보다 편안해 보이셨다. 어려울 듯 했는데 우연히 모든 일이 잘 진행되어 오랜만에 칠 남매가 모두 모여 아버지 가시는 길에 함께 했다. 생전에 그런 모습을 보여 드리지 못한 것을 서로 아쉬워하며 다시 만난 반가움과 아버지를 여읜 슬픔을 동시에 느꼈었다. 울다 웃다, 아버지는 가시면서도 자식들에게 사랑의 자리를 만들어 주신 것이다.
한국에서라면 고위직이나 할 수 있는 경찰의 호위를 앞뒤로 받으며 신호등도 무시한 채 막힘이 없는 길로 보내드렸다. 인부들과의 실랑이도 없었고, 겹 관으로 모래 한 알 틈탈 새 없이 깔끔히, 뒤뚱거리는 불안한 흔들림도 없이 부드럽게 눕혀 드렸다. 아버지가 타인의 장례를 보고 마음속으로 그리셨을 그림 그대로 말이다.
녹화된 비디오테이프를 돌려보면서 눈물과 함께 아버지의 마지막 소망을 이루어 드렸다는 흡족함을 느꼈다. 그러나 가끔 묘지에 가면 의심이 들기도 한다. 둘러보아도 대부분 낯선 이름들 틈이라, 물설고 흙 다른 타국에 정말 머무르고 싶으셨던 것일까. 그 당시 형편상, 자식의 짐을 덜어주려는 최선의 선택은 아니셨을까. 때마다 손보시던 선산 자락이 그립지 않으실까. 아버지의 진정한 마지막 소망이 무엇이었을까. 메아리 없는 질문을 던져본다.
(1998년)
죽음이라는 것, 그 뒤에 자연스레 치루는 장례 절차가 먼 얘기가 아니라
이젠 아주 가깝게 느껴집니다. 사는것도 힘들고, 죽는것도 힘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