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심원의 의무Jury Duty를 의한 통지서

 

 

편지함을 열고 우편물을 꺼내니 법원에서 배심원에 나오라는 통지서가 있다. 돈 내라는 요금청구서보다 백배나 더 달갑지 않다. 받는 순간부터 스트레스를 받는다. 배심원이란 18세 이상의 미국 시민으로, 1년 이상의 금고형을 받지 않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해야 하는 의무다. 운전면허증이 발급된 모든 사람에게 무작위로 선정되기에 피할 수 없다. 미국에서는 배심원이 의무Jury Duty이기에 거부하거나 무시를 하면 1,500불의 벌금을 물거나 감옥까지 간다.

배심원제도는 법의 문외한이어도 지극히 일반적인 상식과 보통사람의 시각으로 사건을 판단하는데 의미가 있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피고인에게 부패하거나 공명심이 지나친 검사, 권력에 순응하거나 편견이나 괴벽에 빠진 법관에 대항하는 안전장치이다. 재판절차에 민주주의적 가치를 투영하는 수단이고, 국민에게 법률교육을 시키고, 법률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제도라고 정의한다. 12명의 배심원을 뽑고 그중 누군가가 병이 나거나 피치 못할 상황에 대비해 3명을 추가로 대기시킨다. 그들은 범인의 유무죄를 결정하고 판사는 형량이나 보상금 등 구체적인 판결을 내린다.

내가 이민 온 1980년도 초에는 영어의 이해력이 부족하다는 핑계로 빠져나올 수가 있었다. 엘에이의 한인 타운 안에서 한국어로 발간되는 신문을 읽고, 한국어 TV 방송을 보며 한인들이 모여 사는 아파트에 거주한다는 주위환경이 이를 받쳐주었다. 한인들뿐이었겠는가.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타민족들이 즐겨 이용했던 핑계다. 이제 영어를 못한다는 초보적인, 이유 같지 않은 이유로 피해 갈 수가 없게 법원은 완강하다.

배심원 대기자 통지를 받은 날부터 내 시간은 묶여 버린다. 정확한 법원 출두날짜를 알려주지 않기에 더욱 불편하다. 정해진 일주일간 다음날 출두를 해야 하는가를 매일 법원에 전화 나 인터넷 사이트에 접속해서 확인해야 한다. 그것도 미리 알아볼 수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전날 오후 5시 이후에야 가능하니 기다리는 내내 마음이 조마조마하다.

미국에 살며 거의 10번 이상의 통지서를 받았고, 그 절반은 형사법정에 배심원 대기자로 참석했다. 매번 씁쓸한 심정으로 법정의 차갑고 딱딱한 의자에 앉아 이곳이 정말 합리적이라는 미국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고는 했다. 대통령이자 독립선언서의 기초자인 토머스 제퍼슨은 정직한 12명의 사람이라고 배심원을 불렀다. 정직이라는 기준이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일반인들로 구성된 그들은 피고와 원고측 변호사가 제시한 증거와 자료 또 증인들의 증언으로 사건을 분석한다. 법 원칙에서 벗어나 지극히 평범한 상식과 판단에 따라 유죄와 무죄를 가름해야 한다. 만장일치가 되어야 하기에 회의를 거듭해야 한다. 배심원 제도의 장점이자 바로 단점은 평범한 시민과 만장일치라고 생각한다. 법률전문가가 아니니 법적인 지식이 없어 변호사의 화려한 언변이나 분위기에 휩쓸려 평결하는 경우가 있다. 객관적인 관점보다는 주관적인 감정에 따르기 쉽다. 그 예로 1995년에 있었던 풋볼선수 OJ 심슨의 살인혐의 재판은 인종적 편견문제가 대두되며 배심원제도의 문제점을 이야기할 때 자주 인용이 된다. 그는 자신의 전처와 전처의 친구를 살해한 혐의로 배심원 재판을 받았다. 결정적인 물증으로 유죄가 확실시될 것이라는 예상을 완전히 뒤엎고 무죄로 판결을 받자 사람들은 경악했다. 흑인 배심원의 수가 많아 인종적인 편견과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해 만장일치라는 두 개의 고리가 법에 수갑을 채운 격이다.

사람들의 시간을 붙잡는 것도 문제다. 대기자들 법원에 나가 최소 하루에서 3일까지 대기실에서 기다리며 자신의 번호가 불리기를 기다린다. 혹 불렸다 해도 몇 그룹으로 나뉘어 각기 정해진 법정에서 50여 명 정도의 사람 중에서 12명을 추리기 위해 다시 여러 단계를 거쳐야 한다. 직장에 휴가를 내고 온 직장인, 수업을 빠지고 온 학생, 작은 가게를 운영하는 상인은 상점을 닫고 와서 마냥 기다리고 있다. 자원하는 사람이 드물어서 그리고 공정하게 하려고 무작위로 불려온 200명이 넘는 사람들의 시간을 저당 잡아 놓는 법이 과연 옳은 것일까? 또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는 것이 당연한데 배심원 선정하는데 시간이 걸리고, 만장일치를 위해 기다리는 판결은 누구를 위한 법인지 아리송하다.

일반인으로서 범죄 유무를 판단하는 일에 참여하는 미국의 배심원 제도는 민주주의의 표상이라고 한다. 시민에게 권한이 주어지고 그들의 상식을 존중한다지만 많은 단점과 일상생활에 불편을 주어서 피하고 싶은 의무이자 권리다. 나만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