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지도책
지도책 보는 요령을 터득하여 사용하면 낯선 길도 두렵지 않고,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어 편리하다. 미국 온 지 한 달쯤 되었을 때 넷째 시누이가 지도를 한 장 주었다. LA와 근교가 여덟 번 접힌 종이 안에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미국에 빨리 적응할 방법이라며 지명과 지리에 익숙해질 수 있도록 자주 보라고 권유했다. 운전면허를 취득하기 전이었고, 혼자 다닐 일도 없었기에 무심히 받아 두었다.
사건이 벌어진 그 날은 오렌지카운티에 사는 시누이 집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고속도로(Freeway)를 달리며, 몇 번의 왕복으로 익숙해졌다는 생각에 긴장을 누그러뜨린 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여유를 부렸다. 둘은 거의 다 왔을 것이라는 느낌으로 주위를 둘러보다 낯선 지명에 깜짝 놀랐다. 내릴 곳을 지나쳤다. 남편과 나는 순간적으로 당황하였지만 반대편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되리라는 예상을 하고 일단 가까운 출구로 나왔다.
일이 꼬이려고 그랬던지, 그 길은 일방통행이라 반대편 입구를 찾을 수가 없었다. 당연히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차질이 생기니 암담했다. 어딘가에 고속도로(Freeway) 입구를 알리는 표지판이 있을 것 같아 이리저리 근처를 헤맸으나 어둠 속에 잠겨버린 길 이름은 읽어낼 수가 없었다. 우왕좌왕하다 보니 방향감각을 잃었고, 동서남북의 분간조차 어려웠다. 그 시작이 어디서부터였는지 더듬어 돌아갈 수도,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어 미로에 갇힌 듯 막막했다. 이럴 때 지도가 있다면 요긴하게 사용할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누이가 경험에서 우러나온 삶의 지혜를 나누어 주려 했다는 것을 그때야 깨달았다.
인적이 끊긴 고요와 어쩌다 하나씩 나타났다 바람을 일으키며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자동차들이 무서움을 남기고 사라졌다. 밤의 정적이 우리 차를 에워싸고, 자동차 불빛에 춤추는 종잇조각같이 을씨년스러운 풍경을 연출해냈다. 일단 큰길로 나가 주유소를 찾는 것이 최선책이라는 생각에 깊게 잠든 주택가를 빠져나왔다.
신호등을 몇 차례 지나니 오른쪽에 주유소 간판이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입구로 들어서다 멈칫했다. 두 대의 차가 주유를 하고 있었는데 험상궂은 흑인들이 가득 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야심한 시각에, 호젓한 장소에서, 체격이 왜소한 동양인 젊은 남녀…’라는 우리의 처지를 생각할 때 섬뜩한 느낌이 앞섰다. 가뜩이나 어둠만으로도 겁이 나는데 또 다른 두려움이 덮치니 몸에 한기가 돌았다.
만약을 대비해 남편은 차 안에 있고, 용기를 내어 그를 향해 걸어갔다. 유난히 하얀 이를 드러내며 피곤한 미소를 짓는 흑인 남자에게 더듬더듬 물었다.
“5번 고속도로는 어디쯤 있나요? (How to get to the Freeway Five?)”
그는 무언가 대단히 잘못됐다는 듯, 손사래를 치며 열심히 설명했다. 내 영어도 서툴지만, 그들 특유의 억양 때문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 사람의 커다란 손동작을 머릿속에 그려 넣고, 어렴풋이 알아들은 길 이름을 열심히 되뇌며 차로 돌아왔다. 우선 왼쪽으로 방향을 꺾어 10분쯤 올라가다 보니 뜻밖에 ‘올림픽’이라는 길이 나왔다.
순간 남편은 아는 길이라며 반가워했다. 그 길을 따라가면 한인타운과 연결이 될 것이고, 그곳에서부터는 집에 갈 수 있다면서 자신 있게 말했다. 남편의 ‘감’에 의지해 그 길을 따라 올라갔다. 정말 15분 정도 지나니 눈에 익은 한글 간판들이 가로등 불빛 아래서 피곤한 듯 늘어져 있었다. 온몸을 조여오던 긴장감과 차 안에 가득한 두려움이 가시고, 고향의 길목에 들어선 듯 눈물이 핑 돌았다.
그날 이후로 낯선 곳에 가야 할 일이 있으면 목적지까지의 상세한 약도를 받아 놓는다. 그러고 나서 지도를 펼쳐 색연필로 가는 길을 그리는 습관을 들였다. 이제는 제법 두툼한 지도책 안에서 내가 원하는 목적지를 찾아내는 속도가 빨라졌고, 제법 잘 읽어낸다. 가끔 길을 잃어 가게에 들어와 묻는 생면부지의 사람들에게도 지도책을 들춰가며 알려주는 친절을 베푼다. 그때 내가 겪었던 어려움을 떠올리며….
복잡한 지도 안에서 목적지를 찾아낼 때면 작은 기쁨을 느낀다. 그럴 때마다 내 삶을 이끌어줄 ‘인생의 지도책’은 없을까 궁금해진다. 내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로 안내해주는 길잡이가 있다면 밤길을 헤매듯 실패나 좌절, 낭패감과 두려움을 겪지 않아도 될 것이기에. 지도책을 읽듯 중간의 과정들을 손바닥처럼 확인하고 막힘없이 장애물 등을 피해간다면 내 삶은 좀 더 경제적이고 능률적으로 꾸며갈 수 있지 않을까.
가끔 힘들 때 도움을 얻고자 현인들이 쓴 글을 뒤적이거나, 인생의 선배가 겪은 경험담을 더듬거려 보기도 했었다. 결국 나에게 딱 맞는 상황이 아니고 그 목적지가 다르기에 적용하기가 쉽지 않았다. 천편일률적이고 진부한 명언들, 또는 타인의 의지대로 전개된 간접 경험들보다는 실질적으로 나에게 적절한 길잡이가 필요했기에 불충분함을 느끼곤 했다.
이제 믿음으로 의지하는 소중한 인생의 지도책 성경이 있기에 든든하다. 우왕좌왕 흔들릴 때 올바른 길을 제시해 주는 진리가 그 안에 담겨 있다, 좌절할 때, 다급할 때. 삶이 버거워 허덕이다 내 인생의 지침이 되고 참 의미를 일깨워 주는 인생의 지도책을 만났다. (19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