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고 시절, 국어 선생님

 

헬레나 배

 

 화창한 토요일, 내가 다니는 '민족학교'  친구로부터 손수 정성스레 구운 조수미의 가곡집 CD를 선물 받았다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설레는 마음으로 CD를 넣었다. '가고파', '동심초', '수선화', '그대 있음에' 등 내가 좋아하는 노래들이 이어지며 애잔하다불멸의 혼이 담긴 가곡들이다소녀 시절 단짝 복희와 고향 논둑길을 걸으며 목청껏 노래 부르던 추억들이 떠오른다.

 

뜻밖에 ‘파랑새’ 노래가 들려온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 장수 울고 간다.

 

 이 구슬픈 가락을 듣는 순간 나는 다시 여고 시절로 돌아간다이 곡을 합창으로 부른 적이 있다여고 2학년 때 ‘교내 합창 경연 대회’가 열렸는데 그때 우리 반이 ‘파랑새’를 불러 일등을 차지했다그건 순전히 담임 선생님이었던 국어 선생님의 공로라 할 수 있다. 선생님은 ‘파랑새’ 곡을 3부로 편곡하여 대회가 있기 몇 달 전부터 방과 후 우리에게 합창을 지도해 주셨다.

 

국어 선생님은  음악에도 상당한 조예가 있었다그때는 선생님께서 왜 그렇게 우리의 합창 연습에 열성적이었는지 잘 알지 못했다그저 음악을 무척 좋아하고 또 우리 반이 일등 하길 원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학교를 졸업한 몇 해 후 그분이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내가 그때까지도 선생님을 잘 몰랐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녀에게 합창은 어떠한 의미의 몸짓이었으리라.  자신의 생이 다해감을 감지하고,  그녀 평생 가장 사랑하던 음악을 우리와 나누며,  자신의 마지막 무대를 불살랐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녀는 30대 후반의  ‘멋진 여성’이었다오드리 헵번처럼 마른 몸매에 마리아 칼라스처럼 땋아 올린 머리가늘고 긴 눈썹과 큼직한 이목구비의 지적 미모를 간직하고 있었다그녀의 스타일이 마음에 들어서 나도 선생님의 나이가 되면 그런 머리 모양과 화장법을 흉내 내보겠다고 속으로 다짐하였다노란 꽃무늬의 원피스를 입고 잰걸음으로 복도를 나풀나풀 걸어가던 모습이 아직도 내 눈에 선하다

 

국어 선생님은 매우 독실한 기독교 신자라,  청렴하고 건실하며 취향이 소박하였다그리고 규율에 매우 엄격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다항상 단정하고 귀족적인 모습의 그분이 한번은 아주 딴사람처럼머리 손질도 하지 않고 화장기도 없는 창백한 얼굴로 우리 앞에 서신 적이 있었는데, 당신 시아버지 초상을 당한 때였다고인을 애도하는 효부의 마음이 우리에게마저 느껴졌는데,  그때가 그분 인생에 있어 어떤 전환점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즈음부터 선생님은  왠지 시들어 가는 꽃처럼 병약해 보이기 시작했고,  결근하는 날도 잦아졌다. 수업 중에도 가끔 몹시 피로해하고 어지러워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우리는 미처 그것이 백혈병의 증세였다는 것을 꿈에도 눈치채지 못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국어 시간이면 국어책 페이지의 여백에 선생님의 한 마디 한 마디를 깨알같이 받아 적곤 하였다선생님은 수업에 철두철미하였지만가끔 과외의 이야기도 하였는데 그중 내가 아직도 잊어버리지 못하는 말씀이 있다.

 

 그녀의 어머니 이야기다그녀가 여대생 시절 어머니와 유난히 친하게 지내는 사이였단다. 그런데 그녀가 서울에 잠시 볼일 보러 간 사이병원에서 꼭 자기를 기다려 주겠다던 어머니가 그만 먼저 돌아가 버리셨다애석하게도 임종 자리를 지키지 못한 그녀는 자기가 곁에 없었는데도 어머니가 그렇게 평화로운 모습으로 눈을 감으셨다는 사실이 너무 야속해서 혼자서 어머니를 오래 원망하였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우리에게 고백하듯 말하였다그때 그 말씀이 왠지 내 가슴 깊이 와 닿았다지금 생각하기에 그녀는 그때 이미 자기의 죽음을 예감하지 않았나 싶다그녀에게는 어린 딸아이가 하나 있었다그녀가 왜 그토록 ‘파랑새’ 노래를 열정적으로 부르며 합창으로 승화하려 했는지그래서 그녀의 어린 딸에게그리고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무엇을 주고 싶었는지 나는 아직도 가끔 떠올려 본다.

 

그녀의 노모는 선생님을 두고도 평화롭게 가셨다지만,  그때 초등학생이던 딸을 두고 먼 길 떠나야 했던 그녀 마음은 얼마나 비통했을까? 아마도 신앙의 힘으로 그 고통을 이겨냈으리라. 오직 신의 가호, 혹은 삶의 섭리를  믿고 자기 딸을 온전히 맡겨야 했으리라. 

 

우리에게  음악의 아름다움과 합창의 웅장한 매력을 알게 해주신 국어 선생님의 사랑은,  지금도 우리 가슴에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인생은 짧지만 예술은 길다고 누가 말했던가?

 

 다시 ‘파랑새’가 흐르고 있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 장수 울고 간다.

 

   청포 장수 울고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