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작은오빠
 
                                                                                               헬레나 배
 
 
 차를 몰며 오랜만에 닐 다이아몬드의 노래를 듣는다. 여전한 그 목소리 -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품위 있고, 남자답고 멜랑콜리하면서도 부드럽고 안정된 느낌이라고 할까? 그의 노래를 들을 때마다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바로 나의 작은 오빠이다. 그는 한때 닐 다이마먼드의 노래를 참 좋아했었다. 우리가 처음 이민 왔을 때 그는 청바지에 청재킷을 걸쳐 입고 빨간 볼크스바겐 레빝(Volkswagen Rabbit) 타고, 다니며 항상 닐 다이아먼드의 에잍트랙(8 track)을 틀곤 했다. 내 차를 갖기 전까지 오빠는 그렇게 나를 자기 차에 태우고 다니곤 하였다.
 
 작은오빠는 나의 바로 위 형제지만 나보다 일곱 살이 더 많다. 그래서 어렸을 때 나의 놀이 상대는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어린 시절의 추억을 함께하는 중요한 사람이다. 어질고 착하며 겸손하고 온화하다 - 이것은 (그의 이름이 '인철'이라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작은오빠에 대하여 떠오르는 나의 즉흥적인 몇 마디 표현이다. 
 
 작은오빠는 어려서부터 우리 네 남매 중 제일 곱게 생기고, 성격이 고분고분하여 집안 어른들은 물론 학교 선생님들에게도 사랑받는 아이였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아침 일찍 일어나 집 앞마당을 싸리비로 깨끗이 쓸어 놓곤 하여 할머니를 기쁘게 하였다. 할머니는 “쟤는 마치 영감 같아.”하시며 기특해하셨다. 그리고 그림을 잘 그려 미술 실기 대회 때마다 온갖 상을 휩쓸곤 하였는데 전국에서 일등 하여 서울로 상을 타러 가기도 하였다. 또 학교에서 행사가 있을 때마다 이 반 저 반으로 불려 다니며 여러 선생님의 환경 정리를 도와드리곤 하였으니 당연히 귀여움과 사랑을 받았다.
 
 오빠는 나와 세대 차이가 있기 때문에 내가 모르는 그 나름대로 추억들이 있을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청소년 시절 오빠의 모습은 다만 어린 내 눈에 비친 단편적인 것이리라. 나는 오빠의 유려하고 독특한 글씨체, 그 시절 나의 우상이었던 영화배우 크리스 미첨처럼 순수하면서도 약간 우수에 젖은 듯한 분위기, 그리고 좀 느린 말투로 들려주던 그의 다정다감하고 유머러스한 이야기들을 좋아했다.
 
 나는 어렸을 때 산수를 너무 못해서 집안 식구들 사이에 ‘맹꽁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곤 했는데 그래도 가끔 작은 오빠가 나를 데리고 앉아 알기 쉽게 가르쳐준 다음 날은 90점 넘게 받기도 했다. 그는 공부도 운동도 다 잘하는 팔방미남이었는데, 자기가 평소 선호하였던 대학인 고려대학교에 응시하여 패배의 아픔을 경험하게 되었다. 나는 아직도 합격자 발표가 있던 그날을 기억하는데 오빠는 밤이 늦도록 집에 들어오지 않아 식구들 마음을 졸이게 했다. 아마 홀어머니와 꼬마 여동생을 볼 면목이 없었던지-. 그날 밤늦게 집에 들어와서 “합격하면 너에게 ‘껌’을 사주려고 약속했는데 미안해.”하며 아쉬워하던 오빠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일 년 재수하던 동안이 오빠에겐 고난의 시절이 아니었을까 한다. 그때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던지 얼굴이 해골처럼 마른 모습이었는데 과연 일 년 후 오빠는 드디어 고대에 합격하여 우리 가족을 모두 기쁘게 하여 주었다. 어느 따뜻한 봄날 우리 식구는 고려대학교 교정의 호랑이상 앞에서 ‘컬러'로 사진을 찍었다. 지금보다 훨씬 젊었던 자랑스러워하던 엄마의 모습도 잊히지 않는다. 엄마는 아들에게 옷 사주기 좋아하여 그 덕에 오빠는 늘 멋쟁이 대학생이었다. 장발에 통기타, 윤형주와 송창식의 시대였다. 
 
 그러나 내 생각에 오빠는 과히 행복하지 앓았을 것 같다. 왜냐하면, 그의 전공이 적성과 관계없이 순전히 엄마의 의견에 따른 장래 ‘유망한’  식품가공학과였기 때문이었다. 오빠의 진심은 그것에 있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나는 잘 알았다. 엄마는 생활이 보장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셔서 오빠가 가고 싶어 하던 미술대학으로의 진학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지금 돌이켜볼 때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선택이었는지 그 당시만 하여도 피차 잘 몰랐다.
 
 그 후 오빠는 군에 입대하게 되었는데 어쩌다 보니 해병대로 들어가 고단한 복무를 하여야 했다. 그때 나는 여중 시절이었는데 오빠는 그 와중에서도 나에게 자상한 편지를 보내주곤 하였다. 어느 날 꿈에는 오빠가 죽어서 내가 그 무덤 앞에서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베개가 흠뻑 젖었던 적도 있다. 그러나 오빠는 3년 동안 국방의 의무를 충실히 잘 이행하고 제대한 후, 미국으로의 이민 준비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 무렵 나의 친구들이 방과 후 우리 집으로 찾아오곤 하였는데. 오빠는 즉석에서 스팸과 버터를 많이 넣은 김치볶음밥에 달걀부침을 곁들여 작은 아가씨들을 대접해 주기도 하였다. 그것이 매우 맛있어서 내 친구들이 아직도 그 맛을 잊지 못하고 있다.
 
 마침내 꿈에 그리던 미국에 오자마자 작은오빠는 그야말로 고생길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그보다 먼저 미국에 와서 봉제 공장을 시작한 큰오빠의 사업이 실패로 접어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밑바닥’ 일부터 시작했지만 그래도 그림 그리는 재주가 있어서 할리우드의 제법 유명한 광고 회사에 취직되어 자기가 평소 좋아하던 빌리 조엘이나 린다 론스타드와 같은 스타들의 포스터를 그리며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곧이어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집 장만을 하는 평범한 행복을 누릴 수도 있었다. 나의 작은 새언니가 된 사람은 내가 ‘만년 여대생’이라고 부르는데 그녀는 소박하고 따뜻하며 낙천적인 성격과 '아메리칸 드림'을 가지고 있었고 무엇보다 오빠를 사랑하였다.
 
 오빠의 첫딸 캐롤라인은 나의 첫 조카이기도 하여 그 아이가 처음 태어나던 날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크리스마스가 가까운 12월 어느 날 카이저 병원 유리창을 통하여 나의 첫 조카를 만나보던 기억을 - 아, 그런 그녀가 자라나 이제 결혼하여 자기의 집을 가꾸며 독립하여 살고 있다니 - 세월이 어쩌면 이리도 빠를 수가 있을까?
 
 이제 오빠의 작품이 미국 미술계에서 조금씩 인정받기 시작하였다니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지금 자신의 둘째 딸 결혼식에서 색소폰 연주를 선사하기 위하여 열심히 연습하고 있다. 만년 소년 같던 나의 용띠 오빠가 이번 사월이면 환갑을 맞는다니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
 
나의 작은 오빠, 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동생이라며 언제나 한결같이 나를 끔찍이도 생각해 줘서 고마웠어요. 우리는 이제껏 각자 나름대로 인생을 살아왔고 또 살아갈 것이지만 당신은 내게 언제나 참 멋진 오빠였어요. 아직도 믿어지지 않지만 “환갑을 축하합니다!”
이제 우리에겐 기쁨과 감사, 그리고 기도로 충만한 날들만 남아 있기를 바라며-.
 
2012년 4월에 닐 다이아몬드의 노래를 들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