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나 / 한경희 - 2024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드디어 칸나가 빨간 꽃을 피웠다.
이른 봄 알뿌리를 마당에 심었는데 석 달이 지나도록 미동도 없었다. 벌레가 먹었는지, 거름으로 땅만 살찌웠는지 의심스러운 그때 조그맣게 파란 싹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날씨가 더워지면서 빠른 속도로 자라 줄기가 굵어지더니 크고 널따란 이파리가 멋스럽게 서로 비켜 가며 자리를 잡았다. 검은 펜스 넘어 우뚝 솟은 칸나의 견고한 줄기에 빨갛고 보랏빛 도는 두툼한 꽃대가 한꺼번에 여럿 올라오고, 닭 볏 같은 빨간 꽃이 피었다. 한여름 무더위에도 꿋꿋이 꽃을 피우는 칸나만큼 열정적인 꽃이 또 있을까. 여러 겹의 빨간 치마를 나선형으로 두르고 플라멩코를 추는 정열의 여인 같은 칸나, 그 칸나 위로 셋째 언니 얼굴이 떠오른다.
언니는 선도 안 보고 데려간다는 우리 딸부잣집 셋째 딸이다. 동네 아주머니가 셋째 언니의 혼처를 가지고 왔을 때 엄마는 펄쩍 뛰며 대번 퇴짜를 놓았고 당사자인 언니에게는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나이가 많고 홀시어머니에 외아들이라는 이유였다. 뒤늦게 사실을 안 언니는 그길로 아주머니 집으로 뛰어가 맞선을 보겠다고 말했다. 집을 떠나고 싶었던 언니는 형부의 직장이 탄탄하니 시집을 가겠노라 선언하였다. 뽀얀 피부에 이목구비가 뚜렷한 언니는 성격 또한 당차고 분명했다.
단출하게 살던 형부는 형제들로 북적이는 처가에 자주 드나들며 나이 어린 처제들을 잘 챙겨주었다. 언니의 시어머니인 사돈 할머니는 하나뿐인 아들을 엄하게 키우셨지만, 며느리에게는 한없이 자상하셨다. 언니는 시어머니를 존경하였다.
방학 때 가끔 가본 서울 언니 집에서는 낯선 냄새가 났다. 새로 지은 집에서 나는 그 냄새는 시골 우리 동네에서는 좀체 맡을 수 없는 도시의 냄새였다. 한여름 언니의 단독주택 수돗가에는 배달해온 커다란 수박이 물에 둥둥 떠 있곤 했다. 너무 커서 냉장고에 넣기도 힘든 수박을 언니는 거침없이 쓱쓱 잘랐다. 수박의 빨간 속살은 어찌나 달콤하던지, 언니처럼 자신만만하게 사는 삶을 꿈꾸게 되었다. 어린 나에게 언니는 이상이었다. 연년생으로 아들을 둘 낳은 언니의 이층집은 부지런한 안주인의 성정이 그대로 나타났다. 언니 중 제일 잘 사는 언니로 내 기억에 남아있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칸나가 무더운 햇빛 속에 피었으니 얼마나 목이 마르고 힘이 들까? 한여름의 땡볕 같은 어려움이 언니 집에 드리워졌다. IMF가 터지면서 형부는 다니던 회사에서 나오고 언니에게 돈을 빌려 간 사람들이 부도를 맞으면서 가세가 급작스레 기울어졌다. 이후 친구가 하는 회사에 들어간 형부가 적지 않은 자금을 여기저기 끌어다 넣었는데, 결국 회사가 문을 닫고 말았다. 넣은 자금을 못 건진 건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애써 지은 단독주택을 팔아야 하는 상황에서 미안한 마음에 형부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다. 하지만 언니는 냉철하고 단호하였다. 집을 팔지 않으면 이혼도 불사하겠다는 말에 형부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피해를 최소화하려는 마음으로 현실을 직시하고 빠른 결단을 내린 것이다. 비관과 원망이 들어설 자리가 없을 만큼 절박했지만 넓은 집에서 남부럽지 않게 살던 언니가 그렇게 아끼던 집을 팔자고 했을 땐 그 심정이 오죽했을까. 언니의 오십 대는 시련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때는 꿈에도 몰랐다. 경제적 어려움이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가장이 되어 보험, 책 외판, 아기 돌보미 등 여러 일을 전전하게 된 언니에게 뜻하지 않은 어려움이 찾아왔다. 바쁘고 힘든 생활 탓이었을까? 어느 날 시작된 하혈이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다. 놀란 마음에 찾아간 집 근처 산부인과에서 자궁 근종이 육 개월 넘은 태아 크기로 자라 있다는 진단을 받고 말았다. 똑똑한 언니가 자신의 건강에 대해 자신감이 있었던 것일까, 생활에 밀려 신경을 쓰지 못한 것일까. 암이 아닌 건만도 어디냐며 가슴을 쓸어내리고 서둘러 대형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
언니의 유방암 진단과 수술. 우리 자매의 충격은 컸다. 서둘러 간 입원실에서 수술을 마친 언니가 여전히 씩씩한 표정으로 우리를 맞았다. 가슴에 멍울이 만져져 곧바로 병원에 왔노라며 웃었다. 지난번 수술 이후 몸 상태에 관심을 가져 그나마 빨리 발견한 모양이다. 가발과 모자가 언니의 애용품이 되건 그때부터였다.
작은아들이 7급 공무원이 되고 대기업 다니는 며느리를 얻으니, 몸을 추스른 언니가 손녀를 돌보느라 형부와 주말부부가 되었다. 암 수술 환자인데 괜찮겠냐며 걱정하였지만 정작 본인은 결연하였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온 언니는 더 적극적으로 삶의 끈을 견고히 다졌다. 튼실한 줄기와 마디가 꽃을 받쳐주는 칸나처럼 강인한 정신력이 언니를 받쳐주었다.
둘째를 낳은 며느리 휴직이 끝나갈 즈음 언니는 식구들과 여행을 갔다 오다 심한 구토를 하였고, 이상히 여겨 간 병원의 검진에서 위암을 발견하고 말았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암이라니. 유방암 치료 후 완치 판정도 받았는데. 병원 바닥에 주저앉았던 언니는 예의 씩씩함으로 벌떡 일어섰다. 조바심내지 않고 힘든 마음을 잘 다독인 언니는 수술을 마친 후에도 평온하였다. 웃음을 머금은 얼굴에서 고뇌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위암은 암세포 퍼진 부위가 중요해.’ 하필 가운데 부분에 암세포가 퍼져 위 대부분을 절제할 수밖에 없었노라며 다른 사람 이야기하듯 담담히 말하였다. 튼실한 기업에 들어간 큰아들도 결혼하고 이제 한숨 돌릴만한데 힘들었던 몸과 마음이 고통을 밖으로 토해낸 것일까.
칸나의 견고한 파란 줄기가 마디를 지나며 붉은 보라색으로 변해갔다. 언니의 안온했던 시기는 칸나의 파란 줄기처럼 평화로웠지만, 경제적 어려움으로 굵은 마디가 생기더니 고군분투하며 암 수술로 점차 붉은 보랏빛 피멍이 들어갔다.
언니는 먼저 앓았던 유방암은 지금의 위암에 비하면 사소한 암에 불과하다는 말로 그 심적 고통을 표현하였다. 위 절제 후 항암치료를 여러 차례 하였다. 항암을 마치고 가다 속이 메스꺼워 정신없이 내려 모두 토하고 길가에 주저앉았던 일, 혓바늘이 돋고 현기증이 일어 하늘이 노래질 때면 그 자리에서 그만 연기처럼 사라져버리고 싶었던 일, 그 힘든 날들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칸나의 또 다른 꽃대에서 여러 개의 꽃도 피어올랐다. 커다란 빨간 새 여러 마리가 비상하기 위해 몸짓하는 모양새다. 꽃이 더욱 짙어진 칸나는 찌는 듯한 햇볕과 비바람을 견디고 병충해도 잘 이겨낸다.
이제 언니 몸은 칸나 같은 언니의 정신세계를 잘 따라와 주고 있다. 지금도 일주일에 이삼일 둘째 아들 살림을 살펴주고 있다. 몸을 먼저 챙기라는 우리에게 손주들이 눈에 밟힌다며 자신이 해줄 수 있어 행복하다고 말한다. 지난 십여 년 동안 언니는 경제적 어려움과 세 번의 큰 수술을 잘 견뎌냈다. 그 힘든 항암치료 중에도 두 아들의 취업과 결혼 그리고 손자 육아까지 해내었다.
추위에 약한 칸나는 서리 내리기 전 알뿌리를 캐어 보관하면 이듬해에 다시 아름다운 꽃을 볼 수 있다.
언니는 꾸준한 건강관리와 섭생으로 추위를 타는 겨울도 병치레 없이 잘 보낸다. 손주들이 커서 자유시간이 많아진 언니는 국내 이곳저곳 여행을 다닌다. 살아보니 인생 별것 없더라. 내가 앞으로 이렇게 마음대로 여행 다닐 시간이 얼마나 되겠니. 지난날을 생각하며 눈물 짓거나 우울한 감상에 젖는 일 따위는 언니 사전에 없다. 무더운 여름에 애써 꽃을 피우는 칸나처럼 굴곡진 세월을 한올 한올 잘 풀어나간 언니의 삶이 깊은 울림과 진한 감동을 준다.
‘언니! 칸나가 멋진 꽃을 피웠으니 보러와.’ 나는 사진을 몇 컷 찍어 언니에게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