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포크너노벨상을 수상한 인물 또는 단체입니다.

포크너의 1954년 모습, 칼 반 베흐텐(Carl Van Vechten)이 찍음
포크너의 1954년 모습, 칼 반 베흐텐(Carl Van Vechten)이 찍음
출생 1897년 9월 25일
미시시피 주 뉴올버니(New Albany, Mississippi)
사망 1962년 7월 6일 (64세)
미시시피, 비할리아(Byhalia, Mississippi)
직업 소설가, 단편 소설가
국적 미국
장르 남부 고딕(Southern Gothic)
수상내역 노벨 문학상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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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커스버트 포크너(William Cuthbert Faulkner, (1897년 9월 25일 ~ 1962년 7월 6일)는 미국 작가이다. 20세기에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 중 한 사람으로, 그는 1949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그의 명성은 그가 쓴 장편 소설과 단편 소설에 바탕을 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시집도 냈고, 때때로 시나리오도 썼다.

포크너가 한 창작의 대부분은 그의 고향인 미시시피를 무대로 하고 있고, 그는 미국 남부 문학에서 마크 트웨인플래너리 오코너, 그리고 테네시 윌리엄스와 함께 가장 중요한 작가 중 한 사람으로 여겨지고 있다. 1920년대 중반에 그의 책이 정기적으로 출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노벨 문학상을 받기 전까지 그다지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현재 그는 미국 역사 전체에 걸쳐 위대한 작가로 여겨지고 있다.

 

* 남들보다 더 잘하려고 고민하지 마라. 지금의 나보다 잘하려고 애쓰는 게 더 중요하다 - 윌리엄 포크너

* 내일이란 오늘의 다른 이름일 뿐. ―윌리엄 포크너 

* 언제나 당신이 할 수 있다고 보는 것보다 높게 꿈꾸고 바라 보라. 단지 동기나 전임자보다 낫도록 신경 쓰는 것이 아닌,

  (현재의) 자신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라. - 윌리엄 포크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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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샌프란시스코 중앙일보/ 2005년 8월 9일 <정신건강에세이>>윌리엄 포크너와 노벨 문학상 
정유석(정신과전문의)

 

 [음향과 분노]를 비롯하여 [사르토리스], [죽어 누어있을 때], [생추어리], [8월의 불빛], [앱설롬, 앱설롬] 같은 훌륭한 역작들을 발표했던 윌리엄 포크너는 193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순수 문학에서 거의 잊혀진 작가로 되어 버렸다. 몇 몇 문인들이나 비평가들을 제외하고는 그를 작가로 기억하는 독자는 거의 없었다. 그 시기는 그가 할리우드에 가서 쉽게 돈을 벌기 위해 수많은 각본을 쓰기 시작한 무렵이었다. 독자들의 무관심이 어떤 경지였는가 추정해 보면 지난 시절 발표했던 소설 17권은 모두 절판되어 어떤 서점에서도 찾아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1946년에 더 바이킹 프레스(The Viking Press)란 출판사에서 편집해 출간된 미국 대표작가 시리즈 중 [The Portable Faulkner]란 그의 대표작 선집이 발표되었을 때 그의 명성은 다시 수면위로 떠올라 크게 각광을 받게 되었다. 특히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비평가들은 그를 천재 작가라고 높이 평가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고 유럽을 나치스에서 해방시킨 미국에 대한 보답이라고 보아야 할까? 그러나 그 무렵 포크너의 건강은 알코올 중독으로 인해 매우 약화된 데다가 부인마저도 그 시절 약물 중독자로 되어 있었다.
1949년 그는 미국 문단을 대표하여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포크너는 글을 쓸 때면 항상 위스키를 옆에 두고 마시면서 글을 쓴다고 자랑했었다. 그는 특히 작품을 성공적으로 마감한 다음이면 지나치게 폭음하는 증세가 반복되었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된 후 그는 극단적인 성취감으로 인해 계속 술을 마셨다. 평상시에 활동이 불편한 그는 침대에 누워 가족들이 날라다주는 술을 마시며 시간을 지내곤 했다.
노벨상을 타기 위해 스톡홀름으로 떠나기 전 그는 오랫 동안 취해 있었다. 그에게 술을 날라다 주던 한 조카가 그날 열린 풋볼 시합에서 자기가 속한 팀이 승리한 것을 자랑삼아 이야기했다.
취한 중에도 포크너는 가족들이 짜 놓은 계략을 금새 알아차렸다. 왜냐하면 풋볼 시합이 있는 날이라면 그는 이미 수상을 위해 스톡홀름에 가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가족들은 그가 상을 탈 때 맑은 정신을 유지할 수 있도록 그에게 날짜를 속였던 것이다. 그 이후로 그는 실제로 상을 타는 전날 밤까지 계속해서 술을 마셔대었다.
그래도 수상 연설에서 그는 지금까지 어떤 수상자들의 연설보다도 뛰어난 연설을 했다. 
“나는 인간의 종말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인류는 고통을 견디어 낼 뿐 아니라 승리할 것을 믿습니다. 인간은 단순히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번영할 것으로 나는 생각합니다. 인간은 불멸의 존재입니다. 
이는 인간이 단순히 만물가운데서 지칠 줄 모르는 음성을 가졌기 때문에서가 아닙니다. 사랑과 희생 그리고 인내가 가능한 영혼과 정신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인의, 그리고 작가의 임무는 이런 것들에 관해 쓰는 것입니다. 인간의 가슴을 가볍게 해 줌으로써 지난날에 가졌던 인간의 자랑인 용기와 명예, 그리고 희생을 상기시킴으로써 그의 생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 이것이야말로 작가에 주어진 특권인 것입니다.”
그는 노벨상으로 받은 상금 전액을 젊은 작가 지망생들을 지원하는데 쓰겠다고 약속했다. 그 결과, 그는 국제 PEN 클럽에 상금 전액을 기부하여 PEN/포크너 소설 상이 탄생한 것이다. 이 상은 아직도 계속되어 오고 있고 그 비중이 점차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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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포크너의 무덤

옆 무덤은 사랑하는 누이가 누어있다. 

마음이 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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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포크너의 생가

그는 생을 마감할 때까지 이곳에서 32년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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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네시 윌리엄스 무덤 앞에서 

 

 

 

테네시 윌리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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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네시 윌리엄스

테네시 윌리엄스 (영어: Tennessee Williams, 1911년 3월 26일 ~ 1983년 2월 25일) 는 미국의 극작가이다. 아이오와 주립 대학에서 극작을 공부하고, 그 후 희곡·시·단편 등을 썼다. 그의 작품의 무대는 그가 태어난 남부 지방이 대부분이며 그 곳에서 과거의 생활을 그리며 살아가는 여성들의 슬픔을 시적으로 표현하였다. 그의 작품들은 세계 여러 나라에서 연극으로 상연되고 있다.

어린 시절[편집]

토마스 레니어 윌리엄스 3세는 미시시피 주의 콜롬버스시에서 에드위나 윌리엄스와 코닐리우스 윌리엄스의 2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인 월터 다킨은 미국 성공회의 목사였고 할머니인 로스 다킨은 음악선생님이였다. 토마스의 아버지는 술을 자주 마셨고 직업으로는 길거리를 떠돌면서 신발을 팔았다. 따라서 집에서 가족과 보내는 시간은 거의 없었다. 그의 어머니는 Southern Belle주의를 믿었다. 토마스가 태어난 후, 월터 다킨은 미시시피주의 클락크스데일시의 교구로 전직해서 토마스는 자신의 할아버지를 따라서 클락크스데일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윌리엄즈는 로즈 (1909-1996)라는 누나와 다킨 (1919-2008)이라는 남동생도 있었다. 그는 어릴 때 “톰”이라는 별명으로 불렸고 누나인 로즈와 굉장히 친하게 지냈다. 연극 학자 알리안 헤일은 토마스와 로즈의 관계가 거의 쌍둥이의 관계같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윌리엄즈 가정에는 오지라는 흑인의 아이를 보는 여자도 있었는데 그녀는 로즈와 함께 어린 토마스와 시간을 가장 많이 보냈다. 따라서 헤일은 토마스가 어렸을 때 여자들에 둘러싸인 환경에서 자라서 그의 작품들에서 흔히 여자들에 대한 공감이 많이 나타난다고 추측한다. 특히 감수성이 풍부했고 수줍었던 로즈는 토마스의 작품들에서 나오는 많은 인물들의 영감이 될 수 있다고 헤일은 주장한다.

토마스는 어린 시절부터 치명적인 병 (디프테리아 혹은 류마티스성 열)에 시달려서 거의 1년동안 집에서 외출을 할 수 없는 불행을 겪었다. 토마스의 아버지 코닐리우스 윌리엄즈는 테네지 주의 동쪽에 거주했던 개척자의 후손이였고 거친 성격을 지니고 살았다. 그는 토마스의 여자 같은 성격을 싫어했고 토마스의 어머니 에드위나는 코닐리어스와의 원치 않은 결혼에 의해서 항상 토마스에게 고압적인 태도를 보였다. 많은 전문가들은 이렇게 문제가 많았던 토마스의 가족이 토마스의 많은 작품들의 자극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교육[편집]

토마스가 8살일 때, 그의 아버지는 미주리 주의 세인트루이스 시에서 일했다. 그는 직업이였던 신발회사에서 승진을 했으나 음주와 폭력적인 성격으로 토마스의 가족을 여러차례 이사하게 했다. 토마스는 자신의 작품인 유리동물원에서 나오는 솔단 고등학교에 다녔고 미주리 주에 있는 다른 공립학교로 전학을 하기도 했다. 16살의 나이에 그는 Smart Set이라는 작문 콘테스트에서 3등으로 수상을했고 1년 후에는 그의 단편소설인 The Vengeance of Nitocris가 Weird Tales라는 잡지에 실리기도 했다. 그리고 17살 때 토마스는 처음으로 유럽에 여행을 떠났다.

1929년부터 1931까지 토마스는 콜롬비아시에 있는 미주리 주립대학에 니면서 저널리즘 수업을 들었다. 이 대학의 저널리즘과는 세계에서 최고로 손꼽혔으나 토마스에게는 수업이 지루하게 느껴졌고 다른 여자에게 깊이 빠져 있었다. 그는 시, 소설, 연극등을 쓰기 시작했고 작문대회에 자신의 작품들을 제출하면서 상금을 많이 받았다. 그는 Beauty is the Word (1930)와 Hot Milk at Three in the Morning (1932)라는 연극을 제출했다.

그 후, 토마스는 입대해서 훈련을 받으려 했으나 실패했고 대학교 2학년때는 아버지가 강제로 그를 신발회사에 취직하게 했다. 토마스는 이것을 굉장히 싫어했고 신발공장에서 일의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그 어느 때보다 글을 더 많이 쓰기 시작했다.

작품 세계[편집]

그는 전후(戰後)를 대표하는 미국 극작가의 한 사람이다. 그의 시적인 대사 표현력은 극적인 분위기와 정서를 무대상에 풍기는 데 있어 발군의 힘을 갖는 작품이다. 한때는 모든 희곡이 윌리엄스조(調)로 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염려할 정도였다. 여성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는 절묘한 맛을 풍기고 있는데, 그 밑바닥에는 감춰진 잔혹성과 같은 것이 있다. 왜냐하면 그가 그려내는 여성의 운명은 비참하기 짝이 없기 때문이다.
청년시대의 그는 학생, 방랑생활, 구두 세일즈맨 등 어수선한 생활을 했는데, 최초의 장편희곡 <천사들의 싸움>(1940)은 그룹 시어터가 채택하여 보스턴에서 시연(試演)까지 했으나 브로드웨이에서의 공연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그 후에도 여러 일에 손을 대어 지방극단을 위해 1막물 등을 쓴 후, 1945년에 상연된 <유리 동물원>의 대성공으로 일약 유명해졌다. <유리 동물원>은 남부를 배경으로 과거의 추억을 고수하는 어머니와 부끄러움이 많은 젊은 불구의 처녀, 그리고 생활의욕에 불타는 청년의 꿈과 좌절을 그린 매우 시적(詩的)인 극이다.
대표작으로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1947) <여름과 연기>(1948) <장미의 문신>(1951)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1955) <하늘에서 내려온 오르페우스>(1957) <청춘의 달콤한 새>(1959) <이구아나의 밤>(1962) 등이 있고, 양상과 형태가 다른 작품으로는 <카미노 레알>(1953) <지난 여름 갑자기>(1958)가 있는데, 여기에서는 그로테스크한 내용을 취급하고 있다.
근작으로는 <밀크 열차는 이제 이곳에 서지 않는다> <작은 배의 위험신호>(1972) 등이 있지만 과거의 빛은 사라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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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올리온스 , 루이지아나 주

재즈 뮤지션 루이 암스트롱 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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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즈 라이브 공연을 들으며 뉴 올리온스 음식을 주문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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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 잔을 서로 부딪히며 즐거운 시간을 즐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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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 안이 손님들로 꽉 찼습니다. 

 


 

1. 개요2. 생애

2.1. 출생과 유년기2.2. 본격적인 음악 입문기2.3. 고향에서 시카고로, 또 뉴욕으로2.4. 첫 리더: 핫 파이브와 핫 세븐2.5. 재즈 뮤지션에서 연예계 대명사로2.6. 활동 후반기: 재즈의 아이콘이자 미국 문화의 상징

3. 수상 경력4. 음악 성향5. 사생활6. 사후의 평가7. 여담

1. 개요[편집]

음악가로서 미국, 그리고 전 세계의 문화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

Louis Armstrong. 중간 이름이 없다. 대니얼(Danniel)이라는 주장이 과거 한 TV 프로그램에서 나왔지만 이는 1949년 타임지가 한번 적은 내용일 뿐, 세례 명부에도 루이스 암스트롱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Louis를 프랑스어식 '루이'로 읽는 것은 암스트롱의 고향인 루이지애나 주가 프랑스 문화에 많은 영향을 받은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닐 암스트롱이 아니다! 닐은 달이고 루이는 재즈다. [1]

미국의 재즈 트럼펫 연주자 겸 가수재즈라는 장르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레전설이자 본좌 중의 본좌 뮤지션이다. 대다수의 미국 중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의 근현대의 문화 파트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역사적 인물이기도 하니 말 다했다. 그만큼 미국의 근대 사회와 문화의 한면을 대표하는 인물이라는 것.

애칭은 입이 굉장히 컸던 데서 유래한 '사치모(Satchmo)'. 원래는 책가방만큼 입이 크다고 해서 새철 마우스(Satchel mouth)라고 불렸지만 이걸 줄여서 사치모, 또 더 줄여서 사치(Satch)라고도 했다. 이외에도 하마 입이라는 뜻의 디퍼마우스(Dippermouth)라는 별명도 있었고, 이 별명에서 나온 Dippermouth Blues라는 재즈 스탠더드 곡도 있다. 

2. 생애[편집]

2.1. 출생과 유년기[편집]

암스트롱 자신은 생년월일을 1900년 7월 4일(독립기념일의 상징성 때문) 로 기억하고 있었지만, 1980년대 중반 재즈사학자 테드 존스가 뉴올리언스 침례교 교회들의 세례 명부를 조사하다가 1901년 8월 4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찾아냈다. 어쨌든 그가 루이지애나 주 뉴올리언스의 업타운 지역에서 찢어지게 가난한 흑인 노예의 후손으로 태어난 것은 확실했다.

아버지 윌리엄 암스트롱은 아내 메리 앨버트(애칭 '메이앤')가 루이와 또 다른 이복남매 비어트리스를 낳자마자 다른 여성과 살림을 차리러 나가버렸고, 루이는 어머니 메이앤과 함께 대부분의 유년기를 보냈다. 남편이 무책임하게 가정을 버렸기 때문에 메이앤은 매춘으로 돈을 벌어야 했는데, 루이와 비어트리스는 종종 '고객'들이 어머니에게 욕설과 학대를 가하는 것을 공포에 떨며 지켜보기도 했다.

취학 연령이 되자 암스트롱은 흑인 아이들이 다니던 피스크 소년학교에 등록했지만, 집안 형편이 현시창이어서 공부보다는 돈을 버는 데 바쁠 수밖에 없었다. 신문배달부와 잔반청소부, 석탄배달부 등 지저분하고 육체적으로 힘든 잡일로 하루하루 푼돈을 벌었고, 먹을 것이라고는 과 빨간 , 다른 사람이 먹다 남긴 고기 부스러기, 오크라뿐이었다. 그것도 한창 자랄 나이에는 턱없이 부족해서, 심지어 잔반 처리를 하면서 먹을 것을 찾기 위해 잔반통을 뒤적이는 것도 일상이었다.

열한 살이 되었을 때 암스트롱은 학업을 따라가기 힘들었는지 학교를 중퇴했고, 또래 아이들과 4중창단을 만들어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며 돈을 벌었다. 중창단 활동이 없을 때면 리투아니아 출신 유대인이었던 카르놉스키 일가에게 가서 일거리를 받았는데, 카르놉스키 집안도 형편이 별로 좋지는 않았지만 당시로서는 드물게 흑인이었던 암스트롱에게 친절을 베풀었다. 심지어 암스트롱이 코넷을 사고 싶어하는 것을 알고는 악기 살 돈을 빌려주기까지 했다. 암스트롱은 카르놉스키 가족들의 은혜를 평생 잊지 않았고, 유대인이 아니었음에도 유대인들의 상징인 다비드의 별이 새겨진 목걸이를 지니고 다녔다.

이렇게 고된 유년기를 보내면서도 암스트롱은 당시 뉴올리언스에서 쉽게 접할 수 있던 초기 블루스와 재즈 연주, 보드빌 쇼 등을 어깨 너머로 볼 수 있었고, 어렵사리 중고 코넷을 구입해 독학으로 연주법을 익히는 등 음악으로 성공하려는 야심을 갖기 시작했다. 하지만 열세 살 무렵 송년회 때 친척 집에서 몰래 빼온 권총을 허공에 쏘아대며 가는 해를 자축했다가 놀란 주민들의 신고로 체포되는 사고를 쳤고, 암스트롱은 소년원에 송치되어 콩밥을 먹게 되었다.

2.2. 본격적인 음악 입문기[편집]

하지만 소년원에서는 뜻밖의 행운을 얻었는데, 당시 음악으로 비행청소년들을 교화시키려고 했던 소년원 음악 교사 피터 데이비스가 암스트롱이 코넷을 어느 정도 불 줄 아는 것을 보고 그에게 처음으로 체계적인 음악 교육을 시켜줬다. 암스트롱은 이내 소년원 아이들이 조직한 밴드에서 두각을 나타내 밴드 리더까지 되었고, 이따금 소년원 밖에서 열리던 특별 공연에서도 참가해 연주했다.

이듬 해 소년원에서 석방된 뒤, 암스트롱은 여전히 낮에는 석탄배달 일을 하면서 돈을 벌고 밤에는 이런저런 댄스홀에서 코넷을 연주했다. 또 축제가 있을 때면 뉴올리언스 거리를 돌아다니며 연주하던 마칭 밴드에도 참가하곤 했는데, 이런 기회를 통해 애송이였던 암스트롱은 이후 초기 재즈의 거물들로 역사에 기록된 벙크 존슨과 키드 오리, 버디 프티, 그리고 암스트롱의 초기 이력에서 매우 중요한 후원자이자 동료가 되는 조 '킹' 올리버와 귀중한 연주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2]

차츰 프로 악단에서 연주할 만큼의 실력이 되자, 암스트롱은 미시시피 강을 운항하던 증기선에 승선해 선상 밴드에서 연주하기 시작했다. 이들 밴드는 관광객을 끌어모아야 했기 때문에 꽤 수준급의 연주자들을 영입하고 있었고, 암스트롱은 이 밴드들에서 연주하면서 비번일 때는 밴드 단원들에게 음악 이론을 배웠다.[3]

이렇게 증기선에서 연주 경력을 쌓으면서 암스트롱은 프로 뮤지션의 소양을 갖추기 시작했지만, 1918년에 1차대전이 끝난 뒤 군항으로 지역 경제 활동의 큰 부분을 맡고 있었던 스토리빌이 폐쇄되면서 고향 뉴올리언스는 급속도로 침체되기 시작했다. 이런 와중에 킹 올리버는 더 나은 수입을 기대하면서 시카고로 옮겨갔고, 올리버가 탈퇴하면서 공석이 된 키드 오리 밴드의 코네티스트 자리는 암스트롱이 이어받았다.

2.3. 고향에서 시카고로, 또 뉴욕으로[편집]

스무 살이 된 암스트롱은 이제 악보도 읽을 수 있었고, 또 집단 합주 형태로 연주하던 당시 재즈 밴드에서 꽤 길고 멋드러진 솔로를 연주하며 부각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뉴올리언스의 불황은 계속되었고, 암스트롱도 결국 1922년에 올리버를 따라 시카고로 떠났다. 올리버는 자신이 이끌던 밴드인 '크리올 재즈 밴드'에 암스트롱을 차석 코네티스트로 영입했고, 이듬해에는 밴드 멤버로서 자신의 첫 SP 음반을 제작했다.

보통 악기 하나 당 주자 한 사람 만을 두던 당시 재즈 밴드의 편성 관행으로 볼 때, 올리버가 후배를 데려와 코넷 파트를 듀엣으로 만든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뒤집어 말해 보면 올리버가 육체적인 문제로 연주 활동에서 점차 의욕을 잃고 있었다는 것이었고, 실제로 크리올 재즈 밴드는 그 당시에도 이미 구식 밴드 취급을 받으며 서서히 영락하고 있었다.

밴드에서 피아니스트로 활동하다가 암스트롱과 눈이 맞아 결혼한 두 번째 아내 릴 하딘은 남편에게 클래식 등 다른 장르의 음악을 소개했고, 또 당시 무섭게 치고 올라오던 신예 밴드들의 참신한 공연을 보러 다니면서 '구세대' 올리버와 결별하고 새로운 길을 찾으라고 종용했다. 결국 1924년에 암스트롱은 올리버의 밴드를 떠나 뉴욕으로 갔고, 거기서 플레처 헨더슨이 이끌던 밴드에 입단했다. 헨더슨 밴드에서 암스트롱은 그 동안 연주하던 부드러운 음색의 코넷 대신 더 힘있고 강렬한 트럼펫으로 악기를 바꾸었다.

헨더슨 밴드는 올리버의 비교적 설렁설렁한 조직과 달리 상당한 수준의 연주 기교와 합주력을 요구하는 어려운 편곡을 받아 연주하고 있었고, 당연히 멤버들은 그 만한 요구를 받아들일 만큼의 실력이 있어야 했다. 암스트롱은 곧 적임자로서 이 밴드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훗날 자신과 함께 재즈의 선구자가 되는 테너색소폰 주자 콜먼 호킨스와 함께 가장 주목받는 멤버가 되었다.

헨더슨 밴드 외에 암스트롱은 고향 출신으로 뉴욕에서 연주하던 피아니스트 클레런스 윌리엄스가 조직한 '윌리엄스 블루스 파이브'라는 소규모 밴드에서도 활동했고, 여기서는 역시 동향인이자 클라리넷과 소프라노색소폰의 화려한 연주로 유명했던 시드니 베셰와 한솥밥을 먹기도 했다. 동시에 베시 스미스와 마 레이니를 비롯한 당대 본좌 블루스 가수들과도 협연하면서 저변을 넓혀가고 있었다.

2.4. 첫 리더: 핫 파이브와 핫 세븐[편집]

하지만 아내 릴이 보기에는 헨더슨 밴드도 올리버 밴드와 마찬가지로 한계에 부딪혀 있었고, 또 그 동안 사이드맨 역할만 하던 남편이 이제는 자신의 밴드를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암스트롱은 1925년에 다시 시카고로 돌아왔고, 여기서 릴의 조언 대로 자신을 리더로 한 퀸텟(5중주단)인 '루이 암스트롱과 핫 파이브'를 결성했다. 핫 파이브는 암스트롱의 트럼펫과 릴의 피아노 외에 암스트롱과 같은 뉴올리언스 출신이었던 키드 오리(트롬본), 조니 다즈(클라리넷), 조니 생시르(기타/밴조)로 구성되어 있었고, 특이하게 드럼이 빠져 있었다.

핫 파이브는 당시 시카고에 스튜디오를 두고 있던 오케에서 첫 녹음을 취입하기 시작했고, 이 녹음이 담긴 음반들은 곧 암스트롱에게 첫 대박을 안겨주었다. 이 때의 녹음 중 'Heebie Jeebies'에서 암스트롱은 트럼펫 외에 짤막하게 아무 의미 없는 단어로 된 즉흥 보컬인 스캣을 처음 선보였는데, 악보를 떨어뜨려 얼버무리려고 했다는 설도 있고 일부러 그랬다는 설도 있다. 일의 진상이야 어떻든, 이 스캣은 트럼펫 연주 외에 그의 장기가 되는 재즈 보컬의 출발점으로 남아 있다.

이 핫 파이브를 기반으로 피트 브릭스(튜바)와 조니 다즈의 동생 베이비 다즈(드럼)가 더해진 '루이 암스트롱과 핫 세븐'이라는 셉텟(7중주단)도 만들어졌고, 암스트롱의 초기 리더작은 거의 모두 이 핫 파이브와 핫 세븐을 통해 녹음되었다. 이렇게 해서 그 동안은 집단적인 솔로와 코러스가 뒤섞인 형태로 연주되던 재즈가 높은 기교와 숙련도를 갖춘 스타 플레이어의 주도로 연주되는 형태로 변형되기 시작했다.

이 변화를 주도한 암스트롱은 이내 흑인뿐 아니라 백인들에게도 강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거물이 되었고, 금주법의 역효과로 급성장한 마피아들까지 자기들이 운영하는 클럽에 암스트롱 밴드를 세우려고 난리였다. 이렇게 해서 암스트롱은 피아니스트 패츠 월러얼 하인스 등과 함께 1920년대 내내 재즈계를 석권했다.

2.5. 재즈 뮤지션에서 연예계 대명사로[편집]

하지만 1920년대 후반 세계 대공황이 터지면서 재즈계도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1932년에 금주법이 폐지되면서 이제 비밀 클럽을 운영하며 밀주로 떼돈을 벌던 마피아들도 버로우하게 되었고, 클럽들이 문을 닫자 수많은 재즈 연주자들도 일거리를 잃고 실직자가 되었다.

그나마 이후 불어온 스윙의 열풍에 적응한 젊은 뮤지션들은 합법화된 클럽의 전속 빅 밴드 멤버로 뛰며 어느 정도 수입을 올릴 수 있었지만, 그러지 못한 보수적인 성향의 올드비 뮤지션들은 음악을 당분간 혹은 무기한으로 중단하고 다른 일을 알아보는 경우가 많았다. 암스트롱의 동료나 선배들이었던 시드니 베셰는 양복점 재단사로, 킹 올리버는 당구장 관리직으로, 키드 오리는 양계업자로 전직해 간신히 입에 풀칠하는 형편이었다.

이런 와중에도 암스트롱은 별로 타격을 입지 않았다. 오히려 1930년에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한 뒤 거기서도 계속 클럽 공연과 방송 출연으로 승승장구하고 있었고, 심지어 1931년에는 처음으로 영화에도 출연했다. 하지만 대공황 여파로 암스트롱의 수입도 점점 줄어들고 있었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 유럽 순회 공연을 진행했다. 거기서도 재즈가 음반을 통해 상당히 많이 보급되어 있었던 만큼 암스트롱의 인기는 대단했고, 이 공연에서도 꽤 많은 수입을 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수입을 많이 올렸음에도 그 중 암스트롱에게 돌아오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암스트롱은 결국 공연 프로모터들을 의심했고, 실제로 그 당시 암스트롱의 프로모터들은 공연장이나 클럽 주인들과 허위 계약 혹은 비밀 계약 등으로 암스트롱의 연주료에서 상당한 액수를 은근슬쩍 삥땅치고 있었다. 결국 프로모터들과 마찰이 잦아지게 되자, 암스트롱은 자신의 전속 매니저로 예전에 알 카포네 밑에서 일한 바 있던 조 글레이저를 기용했다.

글레이저는 다른 프로모터나 매니저들과 달리 암스트롱과 '공정하게' 수입을 나누었고, 덕분에 암스트롱이 자신의 가족들을 제외하면 가장 신뢰하는 인물이 되었다. 하지만 글레이저는 그 당시 암스트롱이 독학으로 익힌 비정상적인 연주법 때문에 트럼펫을 연주할 때마다 심한 피로를 호소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재즈 트럼페터보다 대중가요를 노래하는 가수이자 연예인으로 내세우려고 했다.

이런 전략에 따라 암스트롱의 음반은 트럼펫 연주보다 보컬로 취입한 것이 더 많아졌고, 영화나 라디오 쇼에서도 특유의 큼지막한 입에서 뿜어내는 재담과 익살을 선보였다. 덕분에 암스트롱은 연예인으로서도 상당한 명성과 수익을 올렸지만, 이후 '의식있는' 흑인들이 '결국 암스트롱도 백인의 꼭두각시로 이용당했다'고 깔 빌미를 주기도 했다. 그리고 이 때의 암스트롱만을 접한 사람들은 '특이한 목소리로 노래하고 가끔 트럼펫도 부는 흑인 연예인' 정도로만 기억했기 때문에 재즈에 기여한 업적 같은 건 아오안이었고, 그 때문에 동료나 후배 재즈맨들 중에서도 다소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글레이저는 점점 더 적극적으로 암스트롱의 활동에 개입했는데, 1940년대에 2차대전으로 음악인들의 징집이 늘고 스윙 열풍도 사그라들자 암스트롱에게 그가 이끌던 빅 밴드를 해체할 것을 권유했다. 대신 1920년대의 핫 파이브/핫 세븐처럼 유능한 연주자들을 엄선해 소규모 캄보 형태의 밴드인 '루이 암스트롱과 그의 올스타즈'를 만들었고, 그 당시 유행하던 뉴올리언스 재즈의 리바이벌 움직임에 편승시켰다.

2.6. 활동 후반기: 재즈의 아이콘이자 미국 문화의 상징[편집]

암스트롱은 1940년대에 이미 비밥으로 새 세대가 시작되자 구시대 음악인이 되어 있었지만, 계속 하던 대로 뉴올리언스 스타일에 기반한 연주와 노래를 선보였고 텔레비전 쇼에도 단골로 출연했다. 1949년에는 타임의 표지를 장식한 최초의 재즈 뮤지션이 되었고, 미국 국무부의 후원으로 전세계를 돌며 순회 공연을 진행해 '앰배서더 사치'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 공연의 일환으로 1963년에는 한국을 방문해 공연했는데, 당시 유명 재즈 뮤지션으로는 첫 내한 공연을 한 인물로 기록되었다. 

이렇게 미국을 대표하는 명사가 되자, 전세계의 유력 정치인들과 종교인들도 암스트롱을 접견하면서 이미지 관리를 할 정도가 되었다. 가톨릭 신자가 아니었음에도 교황 비오 12세와 바오로 6세를 알현하기도 했고, 1964년에는 'Hello, Dolly!'로 비틀즈를 밀어내고(!) 빌보드 팝 차트 1위를 석권해 역대 최고령 빌보드 1위 뮤지션이 되었다.

하지만 이후 암스트롱은 수십 년에 걸친 바쁜 연주 활동으로 누적된 피로와 건강 악화에 시달리게 되었고, 빡빡하게 잡혀 있던 일정은 점점 줄어들었다. 하지만 생애 끝까지 은퇴 선언은 하지 않았고, 몸이 허락하는 대로 계속 공연을 뛰고 녹음을 하고 방송에 출연했다. 단적으로 루이 암스트롱의 가수로서 가장 유명한 히트 넘버인 What a Wonderful World는 1967년에 발표된 앨범이다. 이 때 루이 암스트롱의 나이는 67세였다.

1971년 7월 6일에 뉴욕의 자택에서 잠을 자던 중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고, 유해는 여러 유명 재즈 뮤지션들이 참가한 성대한 장례식 후 자택에서 멀지 않은 플러싱 묘지에 안장되었다.

3. 수상 경력[편집]

  • 그래미상 남성 보컬 부문 (1964. Hello, Dolly!)
  • 그래미 평생 공로상 (1972)
  • 그래미 명예의 전당 11회 헌액 (1974~2008)
  •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 (1990)

4. 음악 성향[편집]

평생에 걸쳐 활발한 활동을 했기 때문에 음반 자료도 많고 음악의 발자취와 변화 양상을 확인하기도 비교적 쉬운 편이지만, 1930년대 이후에는 음악사적으로 남을 만한 큰 변화는 없었다. 기본적으로는 뉴올리언스 재즈의 전통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고, 거기에 자신의 화려하고 감수성 풍부한 솔로 연주나 노래를 얹어놓는 것이 일관된 음악 스타일이었다. 트럼펫 솔로의 경우 빠른 템포의 곡에서는 높은 음에서 아래로 미끄러지듯 떨어지는 글리산도를 거듭 연주하며 끝내는 경우가 많았고, 종종 흑인 영가나 유행가, 행진곡오페라 아리아의 멜로디를 인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저 솔로 만으로도 암스트롱은 계속 본좌일 수밖에 없는데, 암스트롱 이전 까지만 해도 재즈에서 즉흥 연주는 기껏 두세 마디 정도로 매우 짧았고 그것 마저도 매우 단순했다. 하지만 암스트롱은 코러스를 전체 합주로 연주한 뒤 리듬 섹션이 곡의 코드(화음)를 기반으로 깔아주는 반주 위에서 더 길고 효과적인 즉흥 연주를 선보였고, 이후 이 즉흥 연주 스킬은 스윙, 비밥, 하드 밥쿨 재즈프리 재즈퓨전 재즈, 뉴 트래디셔널(혹은 컨템퍼러리) 재즈에 이르기까지 어떤 조류에서든 모든 재즈 연주자들의 필수요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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