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그린 힐 언덕 위에
“햇살 가득한 무덤 위에살아 있는 사람과
떠난 사람 사이에 부는
미풍을 느끼고 있을까
레테 강을 건넌 그는
우리의 기척도 체취까지도
이미 다 잊었을까”
지난달 주말 하루, 두 집 아이들과 시간을 맞춰서 모처럼 빠지는 얼굴 하나 없이 그린 힐 가는 길에 나섰다. 이 도시로 옮겨 오고 나서 그린 힐 가는 길이 사뭇 멀어졌다. 러시아워를 피해도 왕복 두 시간이 꼬박 걸리니 아침저녁으로 찾아볼 수 있는 거리가 아니다.
올여름의 살인적인 폭염과 찬 밤의 이슬과 별 시린 외로움을 견뎌낸 무덤가의 수국이 머물다 떠난 혼백의 흔적처럼 늦가을 바람에 희게 부서지고 있었다. 꽃병을 씻어서 들고 온 안개꽃을 꽂아 넣었다. 더위에 군데군데 말라버린 잔디에 아이들이 물을 주고 있는 동안, 그의 묘비에 멍하니 눈길을 주었다.
갑자기 주위가 소란해지며 바로 옆자리의 가족들이 나타났다. 비어있던 옆 가족묘지의 한 자리에 우리보다 1년쯤 후의 어느 날 처음으로 꽃이 놓여 있었다. 새로 입힌 뗏장 위엔 비석이 한동안 보이지 않아서 궁금했었는데 오늘 처음으로 그 가족과 마주쳤다.
“애들 아빠 쉰둘에 심장마비로 갔어요. 그 댁 선생님보다 많이 일찍 갔지요?”
우리 비문을 보아 알고 있는 듯, 친근한 웃음을 띠며 말을 건네는 초로의 부인과 10대 후반으로 보이는 두 자녀에게 애석한 미소밖에는 돌려줄 것이 없었다. 문득 그곳의 두 사람은 이미 밤의 찬 이슬로 대작을 마쳤으리라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시편 23편을 낭독하고 생명수 흐르는 시냇가에서 다시 만날 날을 기약했다. 모두 입을 모아 ‘Jesus loves me’를 아카펠라의 하모니로 끝냈을 때, 손주들이 어느새 성급하게 두 차의 문을 여닫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가 떠나는 기척을 알면 그가 섭섭해할 텐데. 그를 처음으로 이곳에 홀로 두고 떠나던 날의 기억이 차 문을 여닫는 금속성의 소리 사이로 아프게 밀려왔다.
아들과 딸은 모두 아버지가 떠난 후에 결혼해서 며느리나 손주들은 그를 본 적이 없다. 사위만은 예외로 딸과 결혼하고 한참이 지난 어느 날, 생전의 아버지를 뵌 적이 있다고 털어놔서 우리를 놀라게 했다. 딸과 대학 동문인 사위는 딸의 졸업식에 참석한 좋아하던 선배의 아버지를 가까이 다가가 뵈었다고 했다.
1년여 투병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남편은 유머를 잃지 않아서 그의 병상 주위에는 항상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왁자한 웃음소리에 병실에 들어오던 의료진이 자주 흠칫 놀라고는 했다.
딸을 몹시 아끼던 그는 병문안을 온 친구가 “자네는 스트라이크 하나(아들)와 볼 하나(딸)를 고루 두어서 복이 많다”라고 위로를 건넸는데 그는 대번에 머리를 저었다. “원 스트라이크 원 볼이 아니라 투 스트라이크스”라고 반박했다.
동부의 대학에 입학한 딸을 학교에 두고 오던 날, 그는 딸에게 ‘AFC’를 주문했다. ‘Aim For C’, 성적은 C만 받으면 된다는 것이었다.
음성을 잃은 그는 아침마다 병실에 들어서는 내게 ‘I love you’라고 입술로 인사를 했는데 5월의 화창한 그 날은 ‘I love ~’ 한 후 더 이어가지 못했다.
창문으로 햇살이 눈부시게 비쳐드는 오후 3시, 그는 둘러선 10여 명의 친지들 얼굴에 일일이 눈길을 주고 밤에 우는 나이팅게일의 영원한 짝이 되었다. 앞으로 헤쳐나가야 할 노년의 쓸쓸함과 외로움은 온통 남은 내게 떠맡기고 그는 인생의 정점에서 담담하게 삶을 마감했다.
리서치 보조로 한 달에 250달러를 받아 살던 학생 시절, 그에게 공부가 끝나면 어디서 살고 싶으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그는 처음 들어 보는 지명을 말했다. 팔로스버디스라는. 그는 지금 샌페드로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팔로스버디스의 그린 힐 언덕에 누워있다.
지금 햇살 가득한 무덤 위에 살아 있는 사람과 떠난 사람 사이에 부는 미풍을 그는 느끼고 있을까. 이미 레테 강을 건넌 그는 우리의 기척도 체취까지도 다 잊었을까.
박 유니스 /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