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중앙일보] 입력 2022.10.20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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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마당] “목소리 고운 아이들도 많던데”

어렸을 때 집 뒤뜰에는 유난히 꽈리나무가 많았다. 꽈리를 먹으면 목소리가 맑아진다고 엄마는 해마다 정성 들여 가꾼 꽈리 열매를 우리에게 먹였다. 엄마의 이런 수고 때문인지 언니들은 고운 목소리를 갖게 되었지만, 유달리 엄마가 신경 쓴 나는 자랄 때 가을바람만 선뜻 불어도 감기가 들곤 했다. 통과의례처럼 기관지염을 거쳐 기침이 멎고 나면 내 목소리는 거의 한 옥타브쯤 낮아져 있었다.

 

엄마의 꽈리 값을 우리는 꽤 비싸게 치렀다. 그건 저녁마다 가족 합창 대회를 열어야 하는 일이었다. 한국 가곡 백곡 집에 나와 있는 노래를 부르거나 찬송가를 두 파트로 나눠 부르기도 했다. 가끔은 언니의 피아노 반주를 효과음 삼아 어설픈 오페라 놀이를 하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노래는 못해도 기억력은 좋아서 스토리를 꿰고 있던 나는 낮은 목소리로 중간중간 작품 해설을 했다. 훗날 오페라를 공부하면서 이때의 내 역할이 ‘레치타티보’ (아리아와 아리아 사이에 낮은 목소리로 내용을 설명하듯 부르는 오페라에서 가장 인기 없는 파트)라는 오페라의 정식 성부(聲部)임을 알게 되었다.

 

내 목소리에 관해서 처음으로 자각하게 된 계기는 중학교를 졸업할 때였다. 졸업생 답사를 내가 썼고 졸업식에서 낭독도 당연히 내가 하게 될 줄 알았는데 국어 선생님 담임 반의 반장에게 낭독이 돌아갔다. 심한 사투리가 섞이기는 했어도 고운 목소리로 내가 쓴 답사를 자구 하나 틀리지 않고 감동적으로 낭독했다. 그때는 재학생 송사, 졸업생 답사가 낭독되면 졸업식장은 온통 울음바다가 됐는데 답사가 슬퍼서인지 뺏긴 낭독이 분해서인지 흐느끼는 친구들 사이에서 나도 덩달아 울었던 기억이 있다.

 

목소리에 관해서는 내 시어머님과의 일화도 빼놓을 수 없다. 어머님을 처음 뵌 건 아들이 첫 돌이 됐을 때였다. 공부를 마치고 영주권이 나오자 시부모님을 미국으로 초청했는데 두 분 함께 하는 여행은 비자 받기가 어려워서 어머님 혼자 미국 여행길에 오르게 되었다. 그때 육십 대 후반이었던 어머님은 베이지색 원피스를 입고 꼿꼿한 걸음걸이로 세인트루이스 공항 출구로 걸어 나오셨다. 집으로 오는 동안 차 뒷좌석에 묶인(?) 손자를 안쓰러워하는 것을 제외하곤 어머님은 여느 할머니와 다름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나는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남편은 육 남매의 셋째로 위의 두 아주버님 내외가 그동안 자주 미국으로 여행을 왔다. 그때 함께 온 동서들을 통해 어머니에 관해 들어 알고 있어서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며느리 기죽이기에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일가견이 있으신 듯했다. 큰 동서는 대학 입시에 낙방하고 재수하다가 우연히 나간 소개팅에서 큰동서의 외모에 끌린 큰 아주버님과 만난 지 여섯 달 만에 결혼하게 되었다고 한다. 신혼여행을 다녀와서 시댁에 첫인사를 드리는데 어머니는 크게 혀를 차셨다.

 

“공부 마이 한 아아들도 많드구마는!”

 

동서는 이 한마디에  첫 날부터 시댁에서 기를 못 폈다고 한다.

 

둘째 아주버님은 수석으로 입사한 회사에서 그 오너 집안의 사윗감으로 낙점되었다. 따님과 첫 만남을 가졌는데 아주버님은 신붓감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특히 피부색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한다. 이 일로 시댁에서는 작은 소동이 있었다. 보장된 미래를 포기하고 보스댁의 청혼을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신혼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시댁의 문지방을 넘자마자 차가운  어머니의 음성이 들렸다.  

 

“인물 좋은 아아들도 천지에 널렸드마는!”  

 

어머니는 둘째 며느리도 단번에 기선을 제압하셨다. 그래서였을까. 둘째 동서는 고졸인 한 살 위의 큰 동서에게 평생 깍듯이 대했다.

 

시누이와 같은 과 동기였던 손아래 동서는 친구 집에 자주 갔다가 우리 시동생과 가까워졌다. 명문 여대 단과대학 퀸으로도 뽑혔던 동서는 부모님이 모두 일찍 돌아가시고 오빠 밑에서 자랐는데 이 때문에 시댁의 반대가 심했다. 넷째 며느리에게도 어머니는 일침을 놓았다.  

 

“집안 좋은 아아들도 쌨드마는!”  

 

두 시간을 달려 저녁 늦게 롤라(Rolla)시의 집에 도착했다. 아이를 안아서 방에다 재우고 거실에 좌정하신 어머니께 큰절을 올렸다. 어머니의 노토리우스한 평판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나름의 자신도 있었다. 공부도 남들만큼 했고 그리 빠지지 않는 피부도 갖고 있다고 자부했다. 게다가 장인, 장모님 모두 건재하신데 아무 문제 될 일이 없다며 남편은 나를 밀어주었다.    

 

“느그 며느리들은 말키(모두) 내 앞에 엎드려 고마워해야 한다.” 어머니의 제일성이었다. 느그 시부 박봉으로 육 남매를 대학까지 공부시킨 건 오로지 어머니의 공이라고 하셨다. 온 나라가 어려운 시절이기는 했어도 공직에서 은퇴하신 시부님의 박봉 스토리는 설득력에 다소 무리가 있었다. 학부 때의 당신 공로를 거듭 치하하시는 것은 아들의 최종 학력에 일등 도우미인 셋째 며느리에게 전혀 고마울 것 없다는 의사 표시였다.

 

피곤해서 살짝 졸음이 쏟아지려는 찰나, 어머니의 음성이 천둥 치듯 들려 왔다.  

 

“목소리 고븐 아아들도 많드구마는!”

 

어머니의 기막힌 한 수에 남편은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박수를 칠 뻔했다고 훗날 털어놓았다.  

 

어머니는 우리 집에 두 달 계시다가 귀국했고, 그다음 다음 해에 서울에서 돌아가셨다. 학교 문전에도 못 가 보셨지만 타고 난 총기와 파평 윤문 출신이라는 자부심으로 고학력 며느리도 재벌가의 따님도 모두 휘어잡고 평생 사신 분, 함께 한 시간은 단 두 달이었지만 내게 강한 임팩트를 남기셨다.  

 

몇 년 전에 갑상샘에 이상이 생겨 수술을 받았다. 그 후유증 때문인지 매끄럽지는 않아도 발성에는 문제가 없던 목소리가 아주 가늘어졌다. 갑상샘 수술 후 음성을 완전히 잃게 된 사례도 있다고 하니 그나마 감사하며 살고 있다.

 

박 유니스 /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