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중앙일보] 입력 2022.08.04 19:07
용두사미의 변
다도해가 아스라이 보이는 수정산 기슭에 높직이 자리 잡은 교사, 거기 2학년 교실에서 그날 우리는 무슨 궤적인가를 구하느라 머리를 쥐어짜고 있었다. 기하 시간은 우리에게 인기가 없었지만 담임선생님 과목이라 책상에 엎드려 졸기만 할 수도 없었다. 여름 방학이 얼마 남지 않은 7월의 창밖으로는 한낮의 뜨거운 아지랑이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끙끙대고 있는 우리가 딱했던지 일찌감치 문제를 다 풀고 난 반장이 정적을 깨고, “선생님, 육갑 좀 해 보세요.” 했다. 반장은 수학 천재로 담임선생님의 수제자이지만 선생님에게 육갑이라니! 이 일이 무사히 넘어가려나. 그런데 선생님은 돌아서서 칠판에 한자로 된 긴 문장을 쓰기 시작했다.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와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를 쓰고 난 후 풀이하기 시작했다. 처음 듣는 설명이었고 지금껏 본 적이 없는 글자들이었다. 이토록 심오한 세계를 여태 몰랐다니. 충격이었다.
집에 돌아가자마자 어머니에게 나는 무슨 띠냐고 물었는데 대답을 듣고 그날 두 번째로 충격을 받았다. 그림으로만 봐도 징그러운 뱀이 하필이면 내 띠라니. 어머니에게 띠를 바꿔 달라고 떼를 썼다. 어머니는 그건 태어날 때 이미 정해져서 바꿀 수 없으며 이제 띠 같은 건 아무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으니 그만 잊어버리라고 했다. 그 후로 될 수 있는 한 띠에 관한 화제는 피했고 모르쇠로 일관했다. 그렇게 내 인생에 끼어들 일은 없으리라 여겼던 띠 문제가 중요한 고비에서 불거졌다.
결혼을 약속한 우리는 서울 양가에 두 사람의 신상정보를 보냈는데 그의 집에서 이 결혼 허락할 수 없다는 회답이 왔다. 그와 궁합이 안 맞는다는 것이다. 게다가 내가 겨울 출생이라 동면하는 뱀띠여서 좋지 않다고 했다. 신체 건강한 대한민국 여성에게 고리타분한 궁합으로 태클을 걸다니. 여름 방학을 이용해서 결혼식을 올리려던 우리 계획은 자연히 연기되었다.
개학은 다가오고 초조한 나날을 보내던 중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시댁에서 우리 결혼을 드디어 허락하셨다고 했다. 내가 용띠로 바뀌어서 남편과 궁합이 아주 좋다는 소식이었다. 내 생일을 계산해보니 2, 3일 차이로 음력으로 용띠가 된다는 것이다. 용띠 아들을 기대하며 나를 가졌을 때 몸에 좋다는 것은 뭐든 구해 드셨고 용이 여의주를 물고 하늘로 오르더라는 진위를 알 수 없는 어머니의 태몽까지 동원되어서 우리 결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남편은 내가 이무기가 될 뻔했는데 아슬아슬하게 승천한 억세게 운 좋은 용두사미(龍頭蛇尾)라고 놀리곤 했다. 그래서였을까, 내 삶은 용두사미를 많이 닮았다. 나는 헬스클럽 멤버십을 끝까지 이용해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수영은 배우다가 그만뒀고 정구도 새벽부터 레슨받으며 부산을 떨다가 중간에 포기했다. 피아노도 라틴어도 모두 중도 하차했다. 다만 한 가지 골프는 핸디 14가 되도록 계속했고 학교를 중퇴한 적이 없고 결혼 생활도 중간에 파탄 내지 않았으니 그나마 위안으로 삼아야 하려나.
십간십이지에서 개띠와는 특별한 인연이 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네 사람, 어머니와 딸과 두 손자가 모두 개띠다. 경술국치가 있던 1910년(경술년)에 어머니가 출생하셨고 그 후 60년이 지나 다시 돌아온 경술년(1970)에 내 딸이 태어났다. 36년이 더 흐른 2006년(병술년)에 두 손자가 세상에 고고성을 울렸다. 친손자가 그해 10월 14일에 출생했는데 예정일이 아직 석 달이나 남은 외손자가 보름 뒤 10월 28일에 잇달아 태어났다. LA에서 첫 손자와 느긋이 친분을 쌓아가고 있다가 딸의 조산 소식을 듣고 서둘러 버지니아로 날아갔다.
3파운드로 태어난 외손자는 생명줄을 여러 개 몸에 달고 인큐베이터 안에 놓여있었다. 투실한 친손자의 무게에 익숙했던 내 두 팔은 아무것도 안지 않았음에도 무겁게 내려앉았다. 니큐에 아가를 남겨두고 저녁마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딸네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 양옆에는 무심한 버지니아의 단풍나무 잎들이 나날이 아름답게 붉어지고 있었다.
그해 크리스마스가 가까울 무렵, 손자는 나뭇잎이 모두 떨어져 낙엽이 수북이 쌓인 길을 달려 집으로 왔다. 한겨울과 봄이 지나는 동안 손자는 무럭무럭 자랐다. 몸을 뒤집고 머리를 들고 기었고 그리고 드디어 두 발로 섰다.
그렇게 기를 쓰고 개띠 대열에 합류한 녀석은 저보다 2주 먼저 태어난 같은 개띠 사촌과 지금 절친이다. 9학년인 손자들은 키도 훤칠하고 운동도 잘한다. 올림픽 1/2 크기인 우리 단지 안 수영장을 거뜬히 왕복한다. 녀석들이 물장구를 치며 법석을 떨면 6·25 때 난리는 난리도 아닌데 처음엔 눈총을 주던 백인들은, 아이들이 멋진 크롤로 물살을 한 번 가르고 나면 만면에 미소가 번지고 내게도 친근한 시선을 보낸다. 제 부모들이 들인 시간과 수영 레슨비에 1도 보탠 것 없지만 나는 어느 틈에 그들의 시선을 즐기고 있다.
구름을 뚫고 오르려던 하늘은 아득히 멀어졌다. 날아 오를 기백도 기운도 이제는 없다. 가까이에서 늘 곁을 지켜주는 개띠들에 둘러싸여 여전히 용두사미로 산다. 한 가지 놓지 않고 있는 것은 글쓰기다.
글을 쓰며 빛바랜 추억의 부스러기들을 모아 새롭게 채색한다. 무뎌진 감성에 잔잔한 자극을 덧입히고 메말라가는 사유의 광맥을 디그인 한다. 글을 구상하며 내 삶의 물가를 오늘도 천천히 거닌다.
수필의 묘미를 따스하며 자연스럽고 절묘하게 보여주셨네요.
재미있고 진지하게 잘 읽었습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