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유리 그릇과 플라스틱 그릇

박 유니스 / 수필가
박 유니스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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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우리 집 2층 4조 다다미방에는 오시이레라고 부르던 붙박이 벽장이 있었다. 그 안에 어머니가 일본서 귀국할 때 갖고 온 예쁜 그릇들이 많았다. 훗날에 ‘도요 골드 이마리’ 제품인 것을 알게 된 꽃무늬 접시와 받침, 앙증맞은 찻잔, 배가 볼록한 작은 물병 등이었다.

짐작하기로는 옆의 6조, 8조 방들은 월남한 아버지의 일가들이 모두 차지하고 있어서 집엔 그릇 찬장을 들여놓을 자리도 마땅치 않았고 어수선한 시국에 값비싼 기명들로 잔치를 벌일 일도 없었던 듯, 그곳은 종일 아무도 들어 오지 않는 나만의 소꿉놀이 방이 되었다. 난방도 안 된 추운 방에서 조심조심 그릇들을 만지작거리며 온종일 혼자 놀았다.

내 유별난 그릇 사랑은 그때부터가 아닌가 여겨진다. 지금도 찬장엔 쓰지 않는 빛깔 고운 그릇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집을 옮길 때는 이번에야말로 하며 이것저것 여러 가지를 정리하지만 막상 이사하고 보면 그릇은 거의 모두 챙겨 오곤 한다.

레녹스나 웨지우드 같은 견고한 본차이나보다 리모주처럼 부드러운 브랜드에 항상 마음이 더 끌린다. 프랑스 화가 르누아르의 고향이기도 한 리모주는 그 지방에서만 나오는 특수한 점토로 만드는 경질 도자기로 유명한데 디자인과 색상이 뛰어나다. 티포트는 역시 차를 많이 마시는 영국 제품인 스타포드셔가 다양하고 우아하다.
 
몇년 전, 친구들과 스코틀랜드를 여행할 때였다. 여행사 주선으로 에든버러의 오래된 고성에서 ‘오후의 티타임’을 갖게 되었다. 샌드위치가 여러 가지 나왔고 앞에 티포트와 찻잔이 놓여 있었다. 내 집 찬장에 모셔져 있는 귀한 스타포드셔가 테이블에 그득했다.

목걸이 삼아 카메라를 목에 걸고만 다녔는데 이때는 찻잔, 티포트와 크고 작은 접시들을 들어보고 뒤집어보고 사진 찍느라 샌드위치는 한 조각도 못 먹었다.

딸아이에게 주려고 오래전에 리모주 차이나 한 세트를 사 뒀었다. 결혼하게 됐을 때 보여 주니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한다. 색상이 요란해서 담긴 음식이 보이지 않을 것 같다는 것이다. 리모주는 이후 내 찬장에 고이 모셔져 있다.

아들과 딸네와 같은 도시에서 가까이 살 게 된 후부터 내 집 부엌에는 두 집에서 날라오는 음식이 늘고 있다. 음식을 담아오는 용기도 선반에 나날이 쌓인다. 그중 플라스틱은 아들 집에서 온 것이고 유리 그릇은 딸네서 온 것이다.

음식을 담아주는 마음이야 플라스틱과 유리 그릇이 다르지 않겠지만 내게 음식을 담아줄 때, 알뜰한 살림꾼인 며느리는 제 찬장을 열고 지금 나가서 돌아오지 않는다고 해도 아깝지 않을 용기를 고르고 딸은 엄마가 좋아할 깜찍한 사기나 유리 그릇을 골라 든다.

흠하나 가지 않게 애지중지하던 보석들이 아니었던가. 깨어질세라 힘주어 집어 들지도 못하던 유리그릇들이었는데… 아들 딸 모두 내 품에 있을 때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