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거나 짜다

 

 

   길들인 대로 익숙해지는 것이 입맛이다. 나는 탕수육을 좋아한다. 내가 자랄 때는  특별한 날에 먹는 것이 탕수육이었다. 미국에 와서도 나는 식구들과 외식할 기회가 있으면 탕수육 먹으러 가자고 한다. 애들은, 세상에 맛있는 게 얼마나 많은데 맨날 중국집만 가느냐며 불만이다. 중국집에 가서도 맛있는 메뉴가 좀 많은가. 그래도 나는 늘 탕수육을 먹고 와야 만족감이 든다. 

   그날도 우리는 중국집에서 한상 펼쳐놓고 식사를 즐겼다. 요리는 다 훌륭했지만 모두 달거나 짰다. 우리의 미뢰가 어지간한 간에는 맛을 느끼지 못하게 된 건지, 음식 맛이 예전보다 진해졌다는 생각을 했다. 당뇨 고혈압 등이 신경 쓰이는 터라 나는 탕수육을 몹시 좋아하는데도 입맛에 이끌리는대로만 젓가락질 하기가 망설여졌다. 센 간을 중화시키기 위해 식구들은 연신 물을 마셨다. 

   점점 세어지는 자극에 감각은 무뎌지고, 냄비 속 개구리처럼 몸은 서서히 병들어가겠구나 싶었다. 냄비 속 개구리는 물이 데워지면서 온도가 올라가는데도 주변이 조금 더워질 뿐이라고 생각하여 어떤 방비도 탈출시도도 하지 않고 있다가 죽음을 맞는다. 

 

   입맛만큼이나 세상도 극심하게 달고 짜졌다. 강한 자극은 몸만 병들게 하는 게 아니다. 우리의 신경을 긴장시켜 참을성을 잃게 만든다. 대화 중에 사용하는 언어가 거칠어지고, 말싸움은 몸싸움이 되기에 이른다. 심한 경우, 총기나 흉기 사고로 이어지기도 한다. 강한 자극이 강한 반응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짠 음식을 좋아하는 사람은 성격이 급하다는 통계도 있다. 

   자극과 반응 사이에는 생각이라는 완충지대가 존재한다. 세상의 간이 세어지면서 이 완충대가 얇아져가고 있다. 6월 12일, 올랜도에서 한 청년이 총을 난사하여 49명이 희생되었다. 범인 오마르 마틴을 자극한 요소가 무엇이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받은 자극이 조금 싱거웠더라면 자극에서 반응까지의 거리는 멀어졌을 것이고, 비극은 초래되지 않았을지 모른다.

 

   주인아주머니가 우리 테이블에 와서 말을 걸어주는 바람에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음식이 너무 맵고 짜다며 애정 어린 충고를 했다. 아주머니는 음식을 싱겁게 내 놓으면 손님들이 ‘맛 없다’고 해서 주방에서도 자꾸만 맵고 짜게 만들어 낸다고 했다. 그렇다면 주방장이 생각을 주체적으로 바꾸어서 음식을 점진적으로 싱겁게 만들어 내면 어떻겠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우리의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싱거운 음식이 우리 몸을 이완시키고, 사람들 마음이 ‘심심’해져서 사회적 긴장 완화로 이어진다면 그 아니 좋은 일인가?

   밥상머리에서 든 생각이다. (6.20.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