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강과 흰강, 서로의 경계를 내어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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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갈과 고요, 순수한 위엄, 검은 강 위로 떠오르던 노을의 일장관…, 그 야생의 물숲에 머물고 싶다. 아마존의 황토 빛 강물 위를 나룻배로 노닐고 싶다. 아마존은 신의 한 수다. 도시는 사람이 멋을 부리나 자연은 신이 멋을 부린다. 아마존에서의 사람의 일이란 먹고 마시고 잉태하는 것뿐이다. 

   아마존 강은 페루 남부 고산 안데스에서 발원하여 대서양으로 흘러들어간다. 그 하구에는 도시가 발달했는데, 브라질의 마나우스다. 한때 상업으로 크게 번성했던 도시다. 이곳 마나우스에서 두 강 지류가 만나 합쳐진다. 두 강은 반듯하지 않으면서 선명한 경계를 드러내고 있다. 나는 그 만남의 경계를 응시한다. 색도 맛도 다른 네그루와 솔리모이스는 원주민 언어로 흑색강과 흰색강(실제로는 황갈색이다)이라는 뜻이다. 흑강인 네그루는 강산을, 황강인 솔리모이스는 강알칼리를 띤다. 깊고 음산한 네그루는 그 성질 때문에 물고기를 품지 못한다. 그러나 강산성으로 인해 살균 소독 소염 작용을 하여 병자를 치유한다. 반면 황강은 물고기가 살고 있으나 강한 알칼리 농도 때문에 역시 사람이 마실 수는 없다. 

   이들은 제 색을 버리고 하나가 되기 위해 6킬로미터를 울부짖으며 흘러간다. 마침내 그들이 아마존이라는 이름으로 하나가 되었을 때 무색무미의 강물로 태어난다. 그곳에서 풍부한 어종이 살고 플랑크톤이 살아간다. 그 물은 수만 년간 인류를 먹여 살려 왔다. 지구의 허파라는 육중한 책임을 수행하는 것이다. 

   어떤 경계를 허물기까지 우리는 불안하다. 경계 너머에서 오는 불안은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이거나 거부감이다. 낯선 사람을 만나 관계를 형성하기까지 우리는 탐색의 시간을 거친다. 상대방의 외모와 태도를 살피면서 나와 어울릴 사람인지, 어디까지 내어주고 어느만큼 수용할지를 가늠한다. 그런 후 자신의 경계를 허물기 시작한다. 경계는 상대방이 허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개방하여 허물어 주는 것이라야 한다. 그리고 그 허물린 틈으로 상대의 진입을 허용한다. 비로소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이 때 누가 더 많이 허용할 것인가의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 더 많이 사랑하는 쪽에서 더 많이 허용할 테니 말이다. 

한인 사회가 경계에서 갈등하고 있다. 이민 1세인 부모세대와 1.5세, 2세인 자녀세대가 자신의 경계를 놓지 않기 때문이다. 이민 1세는 자녀교육 경제적 이유 등으로 뿌리를 옮긴 사람들이다. 이들은 누구나 어느 정도의 언어스트레스를 안고 산다. 영어를 상당히 잘 하는 사람도 그 속에 곁들이는 정서적 스트레스까지 날리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언어 장애가 3급 중증장애 판정을 받는 분야인 것을 알면 1세들의 고통이 짐작이 된다. 

   이들은 외로움을 달래고 동질감을 얻기 위해 동창회, 독서모임, 동호회 등을 찾는다. 그러나 미국 교육을 받은 아이들은 개인적이고 독립적이다. 부모 마음이란 자녀가 독립하길 바라면서도 끌어안고 싶은 이중성을 지녔다. 이런 모호한 감정을 미국에서 자란 아이는 이해하지 못한다. 부모는 혼자 밥 먹는 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며 자란 세대다. 혼자 밥을 먹는다는 것은 친구가 없거나 고민에 휩싸였거나, 그만큼 심각한 상태에 놓인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 아이들은 식당에서도 혼자 밥 먹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긴다. 혼자 밥 먹으면서 조용히 생각도 하고, 자신을 위한 계획도 짜는 것이다. 타인과 어울리는 일은 ‘필요’에 의해 결정한다. 혼자 밥 먹는 그들이 외롭거나 문제가 있을 거라는 생각은 순전히 부모의 것이다. 교포사회에서 세대 간 갈등은 한국에서보다 심각하다. 세대 차이에 문화 차이까지 더해지기 때문이다. 

   로스앤젤레스에 사는 한 가장은 딸이 만나는 남자친구가 백인 미국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는다. 사윗감과 말과 정서가 안 통할 것이라는 이유다. 아버지는 인사하러 오겠다는 딸의 남자친구를 만나지도 않았다. 한인 이민자와 주류 사회의 경계이고 아버지와 딸의 경계다. 어느 쪽을 탓할 수는 없지만 서로 경계선을 물리는 노력을 하면 좋지 않겠나 싶다. 영특한 민족의 자손인 우리의 2세들은 이지적이고 논리적이다. 이민역사로 보면 현재의 아이들은 4세나 5세에 속한다. 이제 주류 사회로 들어갈 때도 되었다. 한인 2세 로버트 안씨가 연방하원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하여 현재 한인사회의 전폭적 지지를 받고 있다. 타 민족과의 결혼도 그런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한국적 사고에 머물러 있는 아버지와 건강한 미국 시민으로 자란 딸, 지금은 황강과 흑강으로 제 경계를 고집하나 머지않아 얼싸안고 흘러 또 한 세대를 열어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