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할머니’라는 ‘의미 불분명’한 호칭에 대하여 

 

 

 

가주한미포럼(사무국장 김현정) 주최로 글렌데일 시청 앞 소녀상이 지켜지게 되었다고 파티를 한 지 한 달 만이다. 그런데 9월7일 한일 정상회담에서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소녀상 이전을 요구하고 나서 또 다시 한국민들의  공분을 사고 있다. 아베 신조의 계산 된 제스처는 인내심 약한 사람은 포기하고도 남을 만큼 지리멸렬하다.

나는 지금 일본의 역사왜곡을 규탄하려는 게 아니다. 

작년에도 나는 어느 글에서 밝혔듯이 역사문제는 이제 후대에 맡기자. 극일의 방법은 일본을 규탄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우리들의 주장이 세계무대에서 주목 받게 하려면 우리의 힘을 키우는 것이 규탄대회를 하는 것보다 성숙한 자세다. 다만 그들이 한반도와 한민족을 유린하고 침탈했다는 사실만은 분명히 통찰해야 한다. 

내가 소녀상 관련 글을 쓰겠다고 했을 때 어느 분은 ‘소녀상 이야기는 이제 너무 지루하다’는 말씀을 해 주었다. 이것이 아베의 전략이다. 한국민과 일본의 지각 있는 사람들과, 세계의 시민들을 ‘지루하게’ 만들려는 것이다. ‘듣기 좋은 춘향가도 한두 번’이라는 우리  옛 말도 있다. 게다가 사람들의 귀는 불편한 이야기를 즐거워하지 않는다. 지친 사람들은 소녀상 이야기를 더 이상 듣고 싶어 하지 않게 될 것이고, 그 문제는 수면에서 사라지는 것이다. 

 

2011년 12월 14일, 서울 종로구 일본 대사관 앞에 처음으로 이 소녀상이 설치되었다. 해외에서는 캘리포니아의 글렌데일 시청 앞에 세워진 ‘평화의 소녀상’을 필두로 세계의 주요 도시에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전쟁피해여성을 기리는 소녀상이 들어서고 있다. 내년 3월1일, 삼일절에 맞춰 애틀랜타에도 소녀상 건립이 추진 중이라는 소식이다. 그러나 확고한 의식없이 소녀상만 늘어나서는 소용이 없다. 이 소녀상들은 심미적 목적의 예술품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지난 8월 20일, 일본의 소녀상 철거로비에도 불구하고 소녀상을 지켜낸 가주한미포럼의 축하 행사 자리에 있었다. 그런데 누가 언제 결정한 것인지는 몰라도, 글렌데일의 소녀상 설치와 존립 문제를 주도적으로 진행해 온 가주한미포럼은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일본군 성노예 여성들을 ‘할머니’라고 공식 호칭했다. 각종 인쇄물과 현수막에도 할머니와 그랜드마더(Grandmother)를 사용하고 있었다. 순간 그 비장하고 의미 있는 행사장은 경로잔치 같은 맥 빠지는 현장이 되어 버렸다. 

사실, ‘평화의 소녀상’이라는 명칭도 일본의 그 파렴치한 범죄에 대항하는 것이라기에는 너무 소극적인 이름이다. 앞서 말했듯이, 소녀상은 심미의 소산이 아니라 역사의 기록물인 까닭이다. 게다가 위안부 할머니라니, 할머니는 우리가 부를 수 있는 가장 따뜻하고 선한 이름이다.  억울한 전쟁피해자들에게 할머니라는 호칭은 너무 감상적일 뿐 아니라 당시의 사건을 희석시키는 결과까지 가져온다. 명칭이나 호칭은 대외성을 지닌다. 위안부 할머니라는 의미 불분명한 호칭은 생각해 볼 일이다. 위안부라는 말 역시 논란이 있었다. 일본인들이 정한 자발성 강하게 느껴지는 위안부라는 명칭을 우리 정부나 시민단체가 그대로 갖다 쓰는 건, 위안소 설치를 정당화 하는 메시지로도 읽히기 때문이다. 

위안부 할머니보다는 성노예여성이라 해야 맞고, 노예라는 말이 거북하다면 ‘강제 성노동 피해여성’ 내지 ‘전쟁피해여성’ 정도로는 불러주어야 그들의 정체성과 그들을 돕는 사람들의 이유가 드러난다. ‘할머니’는 소녀에서 할머니가 된 현재의 그들을 일컫는 말이다. 거기에는 연민이 담겨 있다. 그러나 지금 시민단체들이 소녀상을 세우고 전쟁피해 보상금을 청구하는 것은 연민으로 하는 일이 아니다. 그리고 그 피해 여성들은 할머니 즉, 노인으로서 노인복지센터에 도움을 청하는 게 아니다. 전쟁피해여성들인 이들은 자신이 겪은 치욕스런 사실을 알림으로써 전쟁의 참상과 두려움을 고발하려는 것이다. 여기에는 일본을 정죄하려는 의도도 굳이 없다. 일본이 전쟁 당사국이었던 때문이고, 그들의 진정어린 사죄를 통해서 무너진 인격과 자존감을 회복하려는 것일 뿐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저 한 많은 소녀상의 이름이 ‘평화의 소녀상’ 이겠는가? 일본 정부의 도량이 여인의 한 폭 치맛감에도 못 미치고 있음이다.

가주한미포럼이나 그 외에 이들을 돕는 시민단체나 시민들은 용기 있는 이 여성들을 돕는 것이다. 불우이웃 할머니를 돕는 듯한 ‘의미 불분명’한 호칭에는 문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