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sungsookessay.com/blog/2018/7/24/-mt-baldy-california


마운틴 볼디(Mt. Baldy)는 굳이 우리말로 하자면 대머리산이다. 나무도 없이 마른 산 정상에 눈이 쌓여 있어 멀리서 보면 대머리처럼 보인다고 붙여진 별명이다. 본래 이름은 마운틴 샌 안토니오다. 정상 높이가 해발 1만64피트(3069미터), LA 인근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높은 산 마운틴 볼디. 4월인데 아직 잔설이 남아 있다.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아이스하우스 캐니언으로 길을 잡는다. 목표는 세 개의 봉우리가 나란히 서 있는 쓰리 티(Three T’s) 트레일이다. 이들 중 가장 높은 봉우리가 두 번째 봉우리(8883피트)이고 첫 번째 봉우리인 팀버 마운틴이 가장 낮지만 산행을 해보면 첫 번째 봉우리에 도달하기까지가 가장 멀고 힘들게 느껴진다. 산행을 결심하기가 쉽지 않고, 몸도 적응되어 있지 않아 초반에 체력을 소진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계곡도 끝나지 않은 초입에서 벌써 숨이 턱에 찬다. 긴장 한 스푼, 고집 한 스푼을 장전한다.

오른쪽 계곡에는 얼음같이 차고 맑은 물이 흐른다. 아이스하우스 캐니언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연중 차가운 바람이 계곡에서 불어오는 곳이다. 지그재그로 놓인 길을 따라 천천히 오르는데 가슴에 통증이 온다. 아이스하우스 캐니언의 찬바람과 고도에 적응하지 못한 폐가 산소를 공급하느라 애를 먹는 모양이다. 두려움을 느끼면서 가까스로 첫 번째 봉우리에 도착한다. 이제부터 내리막이다. 1시간가량 내리막을 걷는다. 정상에 오르기 위해 그토록 애를 먹었는데, 내리막은 쏜살같이 빠르다. 다시 눈앞에 펼쳐진 오르막, 텔레그라프 피크(Telegraph Peak)를 향한다. 볼디 정상보다 낮지만 백두산 높이 정도 되는 산이니 고도와 험준함이 만만치 않다. 여기서 그만 내려갈까 앞으로 나아갈까 잠시 고민에 빠졌지만 앞을 향해 가기로 한다. 쉬어 가면 될 테지.

산길은 스위치백으로 친절하게 놓여 있지만 호흡은 힘겹고 가슴은 냉기로 얼얼하다. 열 발짝씩 걷다 쉬기를 반복한다. 나는 무한히 느리게 걷고 또 자주 쉰다. 드디어 텔레그라프 봉우리다. 축복인양 사방이 탁 트인 하늘에서 뜨겁게 햇살이 쏟아진다. 완전한 성취감이란 이런 것일까. 그동안 가슴 통증은 가셨지만 대퇴부 통증이 시작되고 있다. 15분 휴식.

산을 베고 눕는다. 내가 산에 오른 게 아니라 산이 나를 허락하는 것이다. 땀이 난다 싶으면 계곡에서 바람이 불어온다. 쉬고 싶을 땐 그 자리에 바위가 있고, 힘들어 포기하고 싶어질 땐 쉬어 가며 오라는 산의 명령이 있다. 힘들 땐 쉬어가면 되는 것을, 산 아래의 삶은 왜 그리 조급했는지 등 뒤로 놓인 길이 그걸 묻는다. ‘내가 산을 향해 눈을 들리라’는 가르침이 있다. 산은 창조주를 대변한다. 그 산이 지친 내게 고비마다 위로를 준다. 힘들면 쉬며 오라고. 바람과 햇살이 내 마음을 아는지 지극한 사랑을 뿌리고 간다.

여기서 세 번째 봉우리까지는 그리 멀지 않다. 다시 내리막이다. 나무 덤불을 헤치고 잔설을 밟으며 산허리를 돌아간다. 내리막이라고 다 같은 게 아닌가보다. 그다음 내리막은 수월치가 않다. 거리는 짧은데 경사가 더 심하고, 눈 녹은 물로 길은 질척거린다. 체력은 한계점을 지난 후다. 이번에는 대퇴부와 함께 발가락까지 아프다. 잠시 나무 등걸에 기대어 생각에 취한다. 내리막에도 속도조절이 필요하구나. 더욱 느리게, 돌 하나 나뭇잎 하나를 살펴 가며 걷기로 한다. 산비탈에 은검초가 제법 많다. 토양이 박하지 않은 모양이다.

짧은 내리막과 긴 오르막을 거쳐 마침내 마지막 봉우리에 오른다. 순간 많은 가능성이 내 앞에서 일렁댄다. 쉬어 가며 도달한 정상이다. 포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누구나 거기에 이를 수 있는 것을. 이제 로지(Lodge)를 거쳐 하산할 일이다. 하산로는 크게 가파르지 않지만 제법 먼 거리다. 길은 돌과 자갈투성이다. 걷기에 쉽지가 않다. 그 돌길을 발 절룩거리며 내딛는다. 산행의 끝을 향해 간다.

생기 넘쳐나던 스물 몇 살 때였다. 설악산 대청봉에 올랐었다. 그 기억은 오랫동안 내게 자랑거리였다. 산은 내게 시련을 주었고 그것을 견뎌내라고 했지만, 그때는 오직 높이 오르는 것만이 목적이었다. 나는 산을 정복했다고 믿었다. 그 후 산은 내게서 멀어졌다. 다행히 세상은 내게 호의적이었고 추락하지 않기 위해 바삐 살았다. 어느 날 병이 찾아왔다. 나는 다시 산을 그리워하게 되었다. 그러나 내 삶은 핑계로 가득 찼고 의지도 견고하지 못해 사무치게 그리움만 키우던 산이었다. 진즉 시도했더라면 인생이 좀 달라졌을까. 설악산 대청봉 이후 30년 만에 만난 산은 이제 내게 쉬어 가라 이른다. 오르는 것이 목적이 아니며 높이 오르기 위해 서두를 필요도 없다는 것을 이제야 안다. 산을 향해 눈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