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안시(關)와 시스템 / 이성숙 수필가, 시인


  두뇌활성화를 측정하는 지표 중에 대인관계지수(SQ)라는 것이 있다. 
현대사회에서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아이큐(IQ)나 이큐(EQ)보다 우선하여 고려되는 항목이다. 대인관계지수가 높은 사람이 아이큐나 이큐가 높은 사람보다 우수한 업적을 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덕목 중에 관계라는 것이 있다. 
  중국 사람들은, 중국어로 꾸안시라고 하는 이 관계를 매우 중시한다. 대부분의 일처리가 꾸안시에 의해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좋은 관계’는 더불어 사는 우리에게 필요한 덕목이다. 그러나 21세기에서 바라보는 중국의 꾸안시는 건강한 문화라고 할 수는 없다. 나이든 세대 중에는 중국의 것을 숭상하는 사람이 있는데 ‘꾸안시’도 그 중 하나다. 그들은 꾸안시가 대륙기질인 양 받아들여서 내면화하고 있다. 그러나 꾸안시는 철학이 아니다. 본받을 것과 버릴 것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전통이 늘 옳은 게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기업이나 관공서, 크고 작은 공동체가 운영되기 위해서는 관계보다 원칙이 필요하다. 미국에 처음 와서 학교에 다닐 때다. DMV에 유효가 만료된 운전면허증을 갱신하러 갔다. 면허증 유효기간이 워킹퍼밋(working permit) 만료 기간에 맞춰져 있었는데, 새 워킹퍼밋은 발급 전이었고 나는 아직 학교를 졸업하지 않은 상태였다. 나는 학생비자 만료 기간을 주장하며 면허증 재발급을 요구했고 약간의 실랑이가 벌어졌다. 담당 직원은 “차 없이 학교에 어떻게 출석하느냐”는 나의 딱한 사정은 이해했으나, 나의 읍소를 들어주지는 않았다. 결국 나는 워킹퍼밋 재발급까지 3개월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담당변호사를 찾아갔다. 담당 변호사는 내 상황을 문서화해 주었고, 나는 그 서류로 운전면허증 갱신이 가능했던 것이다. 설명이 장황했지만 이것이 미국이다. 선진 사회는 시스템이 안착된 사회다. 거대한 나라 미국이 작동하는 원리는 다름 아닌 시스템이다. 어떤 일을 처리할 때 관계를 앞세우는 것은 시스템을 무너뜨리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 예는 멀리 있지 않다. 한국의 전직 대통령이 시스템을 무시하고 관계에 의존하다 탄핵이라는 비극을 맞지 않았나. 한국이 선진국으로 성큼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도 안정되지 못한 시스템 때문이다. 
  비논리적이고 몰상식하며 제멋대로인 사람의 비위를 맞추지 않아 ‘관계’가 틀어졌을 때 비위를 맞추지 않은 사람에게 관계의 책임을 묻는 것은 권위적 후진적 접근방식이 아닐 수 없다.  친밀함을 과시하는 ‘꾸안시’가 일견 인간적인 듯 보이나 시스템이 배제된 ‘꾸안시’는 중국식 갑질일 따름이다. 이런 조직에서는 일의 성과도 기대하기 어렵다. 실제로 중국에서도 꾸안시를 부정부패의 근원으로 보고 척결하려고 하고 있다. 
  대인관계지수가 높은 사람은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꾸안시를 형성하지 않는다. 그는 공동체의 이익을 대변하고 시스템을 이해하며 질서를 우선하는 사람이다. 그 다음이 관계다.  
  우주에 떠 있는 행성들은 각자 매우 계산된 항로에 따라 운행한다. 항로를 조금이라도 이탈한 행성이 있다면 우주는 대충돌을 겪을 것이다. 이 완벽한 시스템이 우주를 지탱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