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 소회

 

 책상 앞에 앉아 있는데 등 뒤에서 폭죽 터지는 소리가 요란하다. 나도 모르게 흥겨워서 속웃음이 터졌다. 7월 4일, 미국독립기념일이었다. 이게 미국인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렇다, 이것이 미국이다.

 곧 우리의 독립기념일이다. 8월 15일 광복절.

 그런데 그 경축일을 즐기는 분위기는 많이 다르다. 우리의 파티는 뭐랄까, 어느 정도의 슬픔을 수반한다. 한민족 모두가 공감하는 '한'의 그늘인가 보다. 기념행사야 엄숙하게 치러내야 하는 것이니 그렇다 치고, 개인의 영역으로 들어오더라도 ‘에야 디야, 쾌지나 칭칭나네’를 부르며 신명나게 그 날의 기쁨을 만끽하는 사람들을 보기는 매우 어렵다. 

 어느 유학생의 일기 한 토막을 소개한다. 그는 유학 2년 차로 애틀란타 조지아 텍 부근 아파트에 세 들어 살고 있었다. 1976년 8월 15일, 아침 산책길에 나섰다가 골목의 이층 건물 창가에서 이상한 문양의 태극기를 발견한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과는 건곤감리와 음양이 일치하지 않았지만, 그건 분명히 태극기였다. ‘한인도 몇 명 살지 않는 동네에 광복절을 기념하여 태극기를 내걸다니!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라도 되나?’ 하고 혼자 되뇌며 조깅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얼마 뛰지 않고 되돌아왔다. 그는 실례를 무릅쓰고 태극기가 걸려있는 아파트 문을 두드렸다. 사오십 대쯤 되어 보이는  아주머니가 문을 열었다. 그는 창가에 내건 태극기에 대해서 물었다. 그녀는 말했다.

 “중국 상해에서 독립투사들을 아무도 모르게 뒤에서 도우셨다는 아버지의 유품입니다. 현재의 태극기와는 많이 다르지요. 8월 15일이 되면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고국을 그리워합니다.” 우리가 광복절을 즐기는(?) 방식은 이렇듯 비장하다. 

 미국 사람들의 기념일 파티는 경쾌하다. 역사적으로나 고통의 기간으로 보나 광복절의 기쁨이 훨씬 더 클 것이지만(물론 이런 비교가 어리석다는 것을 잘 알지만) 우리는 조용히 그 날을 보내고 이들은 온 나라가 들썩이며 축제를 연다. 백화점이나 상가는 독립기념일을 맞아 빅 세일에 들어가고 사람들은 그 날을 기다리며 유쾌하다. 한 많은 민족의 자손으로서 그것이 부러운 따름이다.

 뉴욕에 갔을 때다. 우리의 광복절인 8월 15일에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외관에 태극기를 상징하는 흰색 빨간색 파란색의 조명이 점등된다는 얘길 들었다. 나는 느리게 그 전망대를 걸어 돌았다. 뉴욕과 미국을 느끼고 싶었다. 마천루의 도시 뉴욕, 이 화려한 도시의 야경의 일부가 되다니 이보다 멋진 축하가 또 있을까 싶다. 미국적이고 승자다운 방식의 축하다. 승자는 결과를 우선시한다. 우리는 독립을 쟁취하고도 개운치가 않다. 독립은 분단으로 이어졌고 여전히 지구상 유일의 분단국가로 남아있는 현실이 서럽다. 일본과의 끊임없는 과거사 논쟁도 피곤을 누적시키고 있다. 

그러나 돌이켜 보자.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역사 속의 약자가 아니다. 1인당 국민소득은 3만 불에 육박하고 OECD 가입국이며, G20정상회담 개최국이다. 패자의 감정에서 빠져 나올 때가 되었다. 일본과의 과거사 문제는 이제 역사의 판단에 맡겨 봄이 어떤가? 우리의 목표는 미래로 향해야 하는 것이다. 교활함에 대한 응수는 맞수가 아니라 성숙함이다. 의연하게 국가적 실익을 도모하고 승자의 길을 가야한다. 한을 자존감으로 대체할 때가 되었다. 나의 조국 대한민국의 광복절을 축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