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위 달

                                                                                                                                                                유숙자

서울에서 한가위 달을 본지도 20년이 넘었다. 이제는 세월이 지날수록 이곳 생활에 익숙해져서 예전에 알았던 기념일이라든지 명절도 가끔 잊고 지날 때가 있다. 신문에 게재된 행사의 기사를 읽으며, 아! 오늘이 이런 날이었구나 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아직은 명절 때, 때때옷 입고 와서 재롱부릴 손자가 없으니 자식들도 정월 초하루를 제외하고는 무심히 지나게 되는 것 같다. 사는 곳의 관습에 따라 추석보다는 추수 감사절에 온 가족이 모여 받은 은혜에 감사하며 만찬을 즐기는 것이 행사처럼 되어 있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추억으로 들어가는 것일까? 명절 때가 가까워지면 예전에 형제들이 함께 모여 송편 빚으며 밤늦도록 이야기의 꽃을 피우던 시절이 그리워진다. 묵은 이야기를 나누느라 성냥개비로 졸린 눈 버텨가며 밤을 새우던 일. 그때는 어찌 그리 웃을 일들이 많았는지. 아이들은 사내 녀석답지 않게 엄마를 거든다며 네모 송편 세모 송편을 만들고 좋아하며 깔깔대던 모습이 떠올라 한없이 지난 세월 속으로 빠져든다.

 

두 살 터울의 사내 녀석인 우리 아이들은 어릴 때 장난이 심해서 힘들었다. 그저 하루가 이틀 같이 지나가 빨리 자라기만 바랐다. 언제쯤이나 조용하고 한가한 시간을 가질 수 있을까 했는데 세월이 뛰듯이 달아나 이제는 오롯이 둘만 남았다. 자식이 부모 손 탈 때가 제일 행복한 시기라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올해에는 골고루 갖추어진 추석 상을 차리게 되었다. 추석 며칠 전에 서울 언니와 통화하며 추석 이야기가 나왔길래 시간을 두고 제대로 된 명절 음식을 장만하기로 했다. 밤이며 대추며, 싱싱하고 품질이 우수해 보이는 과일을 여유 있게 샀다. 송편도 만들었다. 서울에서 살 때는 쌀을 불려서 방앗간으로 가져가 빻을 때 물을 내린 다음 익반죽을 해서 송편을 만들었으나 편한 대로 쌀가루를 사서 익반죽을 했다. 건포도와 참깨, 밤을 넣은 세 가지 종류의 송편을 예쁘게 만들었다. 한 켜씩 쪄낸 송편에 참기름을 듬뿍 발라서 채반에 담아 놓으며 추석 기분을 만끽\ 했다. 밤이 맞도록까지 만들어 놓은 송편이 소쿠리에 제법 수북이 쌓여 바라만 보아도 흐뭇하다.

 

추석날 아침 송편을 나누려고 채반을 들춰보니 지난밤까지 멀쩡하던 송편들이 반 이상 입을 벌리고 있었다. 어제 송편을 만들며 친구들에게 연락을 했는데 터진 송편이 많으니 난감하다. 생쌀만 빻지 않았을 뿐, 늘 하던 솜씨대로 만들었는데 건조한 쌀가루라 수분이 적었던 듯싶다.

궁여지책으로 반은 온전한 것을, 반을 속이 들여다보이는 것으로 갈라 담아 친구들에게 건넸다. ‘송편 속을 뭘 넣었을까 궁금해할 것 같아 아예 반은 속을 보이게 만들었어.’ 친구들은 나의 어이없는 능청을 천연스럽게 받아 주었다.

‘아무렴, 엽렵하신 어른께서 오죽 현명하게 잘 처리하셨으려고.’ 터진 송편을 맛보며 친구들은 한동안 나를 올렸다 내렸다 했다. 송편 만든 것이 신통해서 올리고 터진 송편 만드는 것도 재주라며 내렸다. 그 말끝에 친구들은 내년에도 부탁한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터진 송편을 놓고도 웃고 즐거워하며 흉허물없이 지낼 수 있어 행복하다.

 

달이 산에서 떠오르는 장관을 구경한 것은 화곡동 집에서였다. 도시 중심에서 살 때에는 건물 지붕 위에서 뜨는 달만 보았는데 야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화곡동에서는 산에서 달이 떠올랐다. 운치 있게 떠오르는 한가위 달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때 나는 무의식중에 ‘달하 높이곰 돋으샤 머리곰 비취 오시라.’ 백제의 유일한 가사 정읍사를 웅얼거리고 있었다.

그때 본 달이 가장 크고 멋지지 않았나 싶다. 야트막한 동산 위로 덩그렇게 떠오르던 한가위 달. 추석 때 우리에게 가장 설렘을 주는 것이 한가위 달이 아닐까. 얼마나 크고 풍요롭게 보였으면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 달만 하여라’라는 말이 있을까. 한가위 때는 오곡백과가 무르익고 한 해의 농작물을 추수하고 난 다음이어서 여유롭고 내년에 다시 풍년을 기원하면서 드리는 감사가 있기에 더욱 넉넉해 보인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마당으로 나올 때쯤이면 동편 산 위에서 온 누리를 밝게 비추며 떠오르는 달,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은 한가위 달을 향해 많은 소원을 빌었다. 한가위 달을 쳐다보고 있으면 감사의 말들이 입 밖으로 저절로 나온다. 그것은 달에 염원을 쏟는 것이 아니라 달을 보며 우주 만물을 창조하고 관장하는 전능자를 향한 감사인 것이다.

신비롭고 조요한 달빛, 달빛으로 흥건히 젖어 있으니 영혼까지 맑아지는 것 같다. 그 빛은 가슴을 꽉 막히게 하는 아름다움이며, 아득한 그리움이며, 아스라이 떠오르는 첫사랑이며, 오래도록 소식 없어 궁금하던 지인의 얼굴이다. 바람결에 스쳐 가듯 슬며시 떠나버린 인연들이 생각나는 이 밤은 달을 바라보며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며 지새어야 할 것 같다.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