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목걸이

                                                                                                                                                         유숙자

 12월로 접어들자 눈 닿는 곳마다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현란하다. 크리스마스 시즌이라는 말이 어울리게 온 도시가 캐럴의 물결에 잠겨 있는 것 같다. 아기 예수의 탄생을 진심으로 축하하고 기뻐하는 교인들과 하나의 명절로 생각하는 사람들 탓에 축제의 분위기는 절정에 달한다.

올해에는 나도 서둘러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들었다. 나이가 들어도 마음은 늙지 않는지 아이들이 어렸을 때 온 가족이 함께 밤늦도록 트리를 만들 때처럼 며칠에 걸쳐 정성껏 만들어 놓았다. 추억의 불도 켜 놓고 꿈도 걸어 놓았다.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지면 멀고 가까운 곳으로부터 반가운 소식이 날아든다. 오늘 내 앞으로 발신인이 적혀 있지 않은 소포가 배달되었다. 포장을 뜯어보니 예쁜 목걸이와 카드가 들어 있었다.

“저에게 사랑과 관심을 두신 것 감사합니다. 작은 정성을 드립니다.”

 

지난봄, 봉사기관에서 일하는 친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긴히 만나봐야 할 사람이 있으니 같이 가서 만나 주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그 사람의 인적 사항이라든지 왜 만나야 하는지를 전혀 말하지 않고 그냥 좋은 일삼아 가자고 했다. 좀 의아한 생각이 들었으나 친구와 함께 약속된 장소로 갔다.

 

마리나 델 레이 바닷가 근처에 있는 어느 집에 당도하니 20대 후반의 단아하고 이지적인 청년이 우리를 맞아 주었다. 친구와는 초면이 아닌 듯 의례적인 인사나마 다정하게 나누었다. 집안은 회색과 검정 톤의 분위기였고 벽에 걸린 단 한 점의 그림이 인상적이었다. 낙엽이 수북이 쌓인 오솔길을 기타를 둘러메고 걸어가는 남자의 뒷모습. 어디선가 본 듯한 그림 같았으나 뒷모습을 보여서일까 어깨가 쓸쓸하다.

 

나는 권하는 차를 천천히 마시며 청년을 바라보았다. 깊고 그늘진 눈빛이며 이따금 초점 없이 먼 곳을 응시할 때, 기나긴 방황의 지친 모습이 보였다. 영혼 깊은 곳에 내재해 있는 우수의 그림자가 언뜻 비치기도 했다. 친구는 나를 소개했다. 그는 고개만 약간 숙일 뿐, 별 반응 없이 찻잔에 시선을 주고 있었다.

 

청년은 음악을 공부하는 여학생을 만났다. 5년여 동안 사귀며 헌신적으로 돌봐 주었으나 어쩐 일인지 공부를 마치자 홀연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청년은 그녀가 있을 만한 곳을 찾아 헤맸으나 떠나간 사람은 끝내 종무소식이었다.

말할 수 없이 큰 충격은 급기야 우울증세를 가져다주었다. 정신과 치료를 받으며 상담자를 만나기도 했으나 그의 상태는 좀처럼 호전되지 않았단다. 친구는 청년이 시댁 조카라고 했다.

 

청년은 찻잔에서 시선을 거두고 한동안 창 너머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드디어 청년이 입을 열었다.

“글을 쓰신다니 작품이나 소개해 주세요.”

그의 음성은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듯 건성으로 나오고 있었다. 다만 견디기 어려운 침묵을 깨뜨린 것뿐이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끌리듯 따라간 나는 어떤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그냥 잠자코 앉아 있었다.

스티븐 코비는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 중 하나로 “먼저 경청하라. 그다음에 이해 시키라”고 했다. 문득 이 말이 생각났다.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지름길은 그의 말을 잘 듣는 것으로 판단했다.

 

나는 친구의 부탁으로 이곳까지 왔습니다. 내가 왜 이곳에 와야 하는지도 모르는 체 따라왔기에 할 말이 없어요. 이왕 자리를 함께했으니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지나온 이야기를 들어 보고 싶어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으나 좀처럼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좀 지난 후, 그는 흩어진 마음을 가다듬듯 처음으로 찬찬히 나를 바라본다. 그의 눈에 차츰 생기가 도는 것이 보였다. 그로부터 거의 2시간이 넘도록 5년여 동안 가슴에 담아 두었던 이야기가 실타래에서 실이 풀리듯 풀려 나왔다. 조용하게, 때로는 감정이 벅차서, 남의 이야기 하듯이, 안개가 감도는 눈빛으로. 가라앉지 않은 열정과 슬픔에 젖은 그의 목소리는 심연에서 울려 나오는 낮은 통곡처럼 처절하게 자신을 토해냈다. 해가 기울어지고 어둠이 내릴 즈음, 우리는 청년의 집에서 나왔다. 가슴 속에서 한 줄기 강물이 흐르듯 여린 아픔을 안고.

 

그는 자신의 마음을 돌려보려고 애쓰는 많은 사람의 반복된 위로, ‘잊어라. 사랑으로 용서해라.’ 에 짜증이 났다. 함께 아파하며 진솔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을 필요로 했다. 아픔으로 보낸 세월의 얼룩진 마음을 실처럼 뽑아내어, 방황하는 영혼에 안식을 줄 수 있는 말 없는 위로자, 따스한 가슴을 원했다.

 

그 후 친구와 나는 청년을 데리고 주로 밖에서 시간을 보냈다. 청년의 감정이 조금씩 부드럽게 변하고 있는 것이 우리에겐 희망이었다. 가끔 추억의 장소를 말할 때는 얽힌 사연을 차분하게 들려주었다. 비록 그의 음성은 조용하나 가슴 속은 그녀를 향한 통절한 그리움으로 절절 했다. 뜨거운 열정이 그리움 되어 떨고 있었다. 그는 아직도 그녀를 뜨겁게 사랑하고 있었다.

 

계절이 지나고 생활이 바빠 잊고 지냈는데-. 오늘 그로부터 뜻밖의 선물을 받고 나니 반가움과 가슴 저림이 동시에 인다.

‘저에게 관심을 두신 것 감사합니다.’

카드에 담겨 있는 마음을 거듭 헤아렸다. 그의 마음에 안정이 깃들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아파하며 이겨 내려고 애썼을까. 아마도 상처의 겉 부위만 나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제보다 한 걸음 더 성숙해진 지금, 사랑과 이해와 용서로써 관용하여 다시 일어선 그가 무척 대견스럽다.

 

나는 크리스마스트리 맨 위에 목걸이를 걸어 놓았다. 청년의 사랑 이야기를 싣고 목걸이는 트리 위에서 꿈을 꾸리라. 꿈꾸며 기다리는 사람만이 얻어지는 고귀한 사랑이 어느 날엔가 청년에게 찾아오리라는 소망을 안고-. 긴 어둠이 지난 뒤에 새벽이 열리듯 그의 어두웠던 영혼의 텃밭에 진달래꽃 빛 같은 사랑이 다시 피어날 것을 고대해 본다.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