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역국과 샐러드
유숙자
토요일 이른 아침에 큰며느리 크리스로부터 전화가 왔다. 한껏 들뜬 목소리로 미역국을 어떻게 끊이는가를 물었다. 크리스는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남편의 생일을 자신이 차리고 싶다고 했다. 음식은 밥과 미역국, 샐러드를 만든다고 한다. 해마다 내가 차려 주던 생일이었는데 며느리가 들어오니 이런 날도 있구나 싶었다. 신통하게 생각한 것도 잠시, 며느리의 음식 솜씨를 익히 알고 있기에 갈비와 잡채는 내가 준비하겠노라 했다.
며느리는 자태가 곱고 차분해서 천생 여자답다. 시카고에서 태어났으니 사고방식이 미국 아이와 같다. 며느리의 손이 모델을 할 만큼 예쁘다는 아들의 말 을 들어서가 아니라 가늘고 긴 손가락이 애처로워 설거지 한 번을 제대로 시키지 못했다.
내가 젊었던 시절, 남편도 시댁에 가서 일하는 나를 보고 안쓰러워했기에 아들의 마음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런 내 마음을 모르는 남편은 며느리 곱게 돌려보내고 시아버지에게 설거지시킨다고 불평한다. 남편은 신혼 시절 내게 했던 일을 까맣게 잊었을까.
며느리는 항상 손님같이 왔다 가는데도 결혼하고 처음 맞는 정월 초하룻날 세배를 오지 않았다. 성탄절에 다녀왔으니 설날은 집에서 쉬고 싶다고 우겨 아들 혼자서 왔다. 결혼 전에 며느리 친정에서는 정월 초하룻날 세배를 다니지 않았고 세배를 하러 온 사람도 없었다고 한다. 아들의 세배를 받으며 우리 내외는 그저 웃었다.
며느리를 맞고 보니 새삼 나의 새댁 시절이 생각난다. 지금은 왁자그르르하던 그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으나 시댁에서는 차례와 봉제사가 많아 참으로 힘들었던 세월이었다. 더욱이 나의 친정이 기독교 집안이어서 제사가 생소했다.
12월에 결혼한 나는 불과 20여 일 만에 정월 초하루를 맞았다. 그 해는 유난히 강추위가 심해 물 묻은 손으로 문고리를 잡으면 손이 척척 달라붙었다. 시댁은 한옥이라 마루에서 차례를 지냈다. 분합이 있었으나 하도 들고 나는 사람이 많아 문이 닫힐 사이가 없었다.
새댁인 나는 모든 일이 서툴러 긴장되었고 차례 준비하며 얼마나 떨었는지 몸이 녹초가 되었다. 늦은 식사를 마치고 좀 쉬려고 뜰아랫방으로 가는데 마당 수돗가에 제기를 비롯한 그릇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방에 들어와서도 그릇 무더기가 눈에 밟혀 마음이 편치 않았다. 형님들은 안방에서 느긋하게 담소를 나누고 있으니 아무래도 그 몫은 막내며느리인 내가 해야 할 것 같았다.
저고리 화장을 걷어붙이고 마당으로 나갔다. 쭈그리고 앉아 손을 물에 담그는 순간 뼛속까지 찬 기운이 스며들었다. 겨드랑이 사이로 파고드는 바람이 눈물이 날 만큼 매워 심장이 곧 멎을 것 같았다. 설거지가 거의 끝날 무렵 안방에서 나오던 남편이, 나를 보자 얼른 일으키더니 뜰 아랫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꽁꽁 얼어 빨개진 두 손을 입김으로 녹여주고 비벼주면서 내년부터는 오지 말자고 했다. 철없는 신랑의 말이 아주 달콤하게 들려 손과 마음이 봄눈 같이 녹았던 새댁 시절이 나에게도 있었다.
가족이 모여 식사하던 어느 저녁, 결혼한 지 8개월이 된 큰며느리가 내게, 신혼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졸랐다. 나는 친정어머니가 하셨던 말씀을 해 주었다. 결혼 후 첫 번 맞는 남편의 생일은 아내가 정성스럽게 차려 보라고 하셨던 말씀을. 그때 어머니는 한 가정을 이루었으니 어른이 된 것을 실감시키고자 하셨던 것 같다. 서툴렀으나 누구의 도움 없이 차렸다는 말을 해 주었다. 며느리는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저도 할 거예요' 하고 쉽게 받아들였다.
며느리는 음식을 만들 줄 모른다. 고기는 징그러워 만지지 못하고 먹지도 않는다. 결혼 후 지금까지 음식은 아들이 도맡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생일을 차리겠다니 어찌 감격하지 않을 수 있을까.
며느리가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지 두어 달 후, 나와 함께 며칠 지내고 싶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남편이 지금 아니고서야 언제 이런 초청이 다시 오겠느냐고 등을 밀기에 신혼의 향기가 싱그러운 아들네로 잠시 머물러 들어갔다.
며느리는 집안을 곱게 단장했다. 거실을 분홍색 장미로 장식하여 수반에도 꽃병에도 장미가 소담스럽게 꽂혀 있었다. 온 집안이 분홍빛으로 채색되었다.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 2악장이 장미의 향과 어울려 시처럼 흐른다.
내가 결혼 전에 가졌던 꿈, 온 집안 시선이 머무는 곳마다 꽃이 있었으면 하던 바람- 그 꿈을 며느리가 용케 알아낸 것이다. 행복했다. 그 분위기에 걸맞은 서양식 레스토랑에서 가진 저녁 식사도 환상이었다. 나를 위해 여러모로 준비하고 배려한 아들 내외가 고마웠다.
뉴포트 비치에 사는 아들은 사무실이 다운타운 엘에이이어서 아침 6시 이전에 출발한다. 반면에 며느리 사무실은 집에서 불과 10여 분 거리에 있다. 아내를 위한 배려라 해도 매일 세 시간 이상 운전해야 하는 아들이 안쓰럽다.
다음날 정시에 퇴근한 며느리는 일찍 들어 왔으나 아들은 비가 내려 길이 많이 막힌다고 몇 번이나 전화했다. 그 말끝에 저녁이 늦어 걱정된다는 말을 비췄다.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으나 서두르지 말라고 여유를 주었다.
저녁 시간이 훨씬 지났는데도 며느리는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고 태연히 앉아 있다. 며느리에게 저녁 준비를 서둘자고 했다. 그때 며느리는 내 팔을 잡으며 기상천외한 말을 한다.
'앉아계세요. 리처드가 와서 해요.' 나는 멍해져서 엉거주춤 부엌 입구에 서 있었다.
그때 아들이 허겁지겁 들어왔다. 후리웨이에서 2시간 이상을 보냈다고 한다.
'엄마 미안해요. 배 고프시지요. 금방 만들어 드릴게.'
아들은 상의를 벗어 카우치에 던지며 급히 부엌으로 들어와 손을 씻는다. 천연스럽고 익숙하게 저녁 준비를 한다. 그 곁에 며느리가 호위병같이 서 있다. 그제야 저녁이 늦어진다고 걱정하던 말의 감이 잡힌다. 고기를 녹이고 채소 썰고 이것저것 만들고 있는 아들을 바라보고 있는 심정이 착잡했다.
오래전에 영국에서 살 때, 그곳에서는 중학생에게 음식 만드는 법을 가르쳤다. 그때 아들이 어찌나 음식을 잘 만드는지 장차 요리사가 될 가능성이 보인다고 선생님께서 노트해 준 적이 있었다. 그뿐인가. 집에서 함께 살 때도 가끔 이탈리아 요리, 멕시코 요리 등 다양하게 만들어서 식구들의 입을 즐겁게 해 주었다. 어디서 배웠는지 아들은 기막히게 음식을 잘 만들었다. 아들이 음식을 잘 만드는 것과 먼 길을 달려와서 음식을 만들어야 하는 것은 다르다. 아들이 측은했다.
'네가 매일 음식 만드니?' 며느리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재빠르게 물었다.
'네, 제가 만드는 것이 빠르고 맛있으니까 그냥 제가 해요. 크리스는 음식을 만들 줄 몰라요. 대신 빨래는 아주 잘해요.'
빨래는 기계가 하지 사람이 하느냐는 말을 나는 하마터면 할 뻔했다.
'그래?, 크리스는 빨래를 잘하는구나.' 끓어오르는 속마음과 달리 태연하고 부드럽게 대꾸했다.
지금도 여전히 음식은 아들 몫이다. 잘하는 분야를 맡아서 하는 것이 일의 효율이 높다고 효율성까지 들어가며 배려해 주니 그것도 며느리 복이 아니겠는가. 오히려 음식 못 만든다고 타박을 준다면 서로가 힘들 텐데 아들이 편하게 생각하니 다행이다.
음식을 만들 줄 모르면서도 남편의 첫 생일을 차려주고 싶어 미역국을 끓이겠다고 한 마음씨가 가상하다. 김치는 며느리가 싫어해서 샐러드를 만들겠다고 하니 신세대며느리 덕분에 맛볼 수 있는 퓨전 생일상이 될 것 같다.
인간의 기쁨은 작은 것에 숨겨져 있는 것을 수없이 경험한다. 따뜻한 말 한마디나 정겹게 베푸는 마음 한 자락 건네받고 눈물이 핑 돌던 때가 있지 않던가. 아들이 아내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며 감싸주는 모습이 곱다.
퇴근길 거의 매일, 전화로 안부를 묻는 아들의 자상함에 가슴 뿌듯하다. 먼 곳에 살고 있으나 자주 들르려고 노력하는 아들 내외의 성의가 기특하다. 꽃 좋아하는 시어머니에게 가끔 두 팔 가득 꽃을 안겨 주는 며느리의 예쁜 짓이 고맙다. 시어머니의 음식 솜씨가 최고라며 쳐주는 바람에 갖은 요리 솜씨를 다부려 가며 음식을 만들고 아들 내외를 기다린다.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