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듀 1999
유숙자
한 장 남은 달력이 몇 개의 잎사귀만 남긴 채 서서히 나목으로 되어가고 있다. 지난 일 년간 365개의 무성했던 잎들이 거의 떨어져 버린 지금. 그 잎들은 우리의 삶에서 어떻게 꽃피고 열매 맺었을까.
해마다 새해를 맞으면서 우리는 소망하는 것들을 꿈꾸고 보람의 열매를 거두기 위해 노력을 기울인다. 한 해를 보내야 하는 이 시점에서 돌이켜 보면 사람마다 조금씩은 다르겠으나 만족하게 보냈다는 생각보다 계획했던 일들의 차질과 시행착오 속에 아쉬움, 미련, 회한의 시간이 더 많을 것이다. 한해의 삶과 일을 정리하며 성취와 실패를 반성하고 성찰하는 것은 새로운 각오와 새날을 위한 도전이기도 하다.
캐럴이 들리기 시작하면 성탄의 기쁨과 또 한 해가 저문다는 서글픔과 설렘이 공존한다. 우리는 흔히 한 해를 마감하며 다사다난했던 한해란 말을 쓴다. 그 말 속에는 우리를 기쁘게 했든 일과 슬프게 했든 일들도 있다.
윌셔가에 우뚝 서 있는 빌딩 중에는 한인들의 소유도 적지 않다는 기사를 읽을 때, 주류사회에서 번듯하게 성장한 벤처 기업가를 볼 때 마음이 뿌듯하다. 또한, 로즈 장학생으로 뽑혀 옥스퍼드 대학으로 유학 가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딸이나 박세리, 박찬호 선수, 그 외에 각고 끝에 정상에 오른 음악인 등 많은 자랑스러운 한국인들이 우리를 기쁘게 한다.
이 미국사회에서 한국인을 볼 때 부지런하고 성취욕이 강한 우수한 민족이라는 찬사를 듣는다. 반면 얼굴을 들 수 없이 우리를 부끄럽게 만드는 일들도 종종 일어난다. 정직과 진실을 중히 여기는 이곳 사회에서 진실성이 결여 되고 부도덕한 일에 한인들이 거론될 때이다. 투철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한인 타운에 들어와 봉사하다가 한인들의 투서에 못 견디어 외곽으로 옮겨가는 한인 경찰관의 이야기를 들을 때 마음이 쓸쓸하다.
이역만리 미국에 이민와서 오랜 세월을 두고 일구워 놓은 자신의 일터에서 강도의 총을 맞고 비명에 가는 우리의 이웃을 보며, 일본상사의 차별대우가 억울해서 스스로 목숨을 끈은 사연 등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살아가며 희비를 겪는 것은 어쩔수 없는 일이라 하더라도 올해 유난히 많았던 한인들의 죽음을 보면서 이민자의 고뇌를 뼈저리게 실감한다.
우리는 열심히 사는 것도 중요하나 살아가며 정신적 여유를 갖는 것이 더 중요하다. 높고 끝없이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마음을 열고 시야를 넓혀 넓은 세상을 바라보며 살아야 겠다. 우리의 좋은 점, 우수한 점은 더욱 고취시켜 주류사회에 널리 알리고 바른것이 아니라고 확신하는 것은 과감하게 버릴 줄 아는 용기를 갖어야겠다. 성실과 노력을 바쳤기에 후회하지 않는 삶을 우리모두 갖었으면 한다.
자녀들이 부모와 대화하고 싶어도 우리들이 바쁨에 싸여 그들에게 섭섭함을 준적은 없었을까. 그들의 세대를 이해하지 못하여 답답함을 준 적은 없었는지 조심스럽다. 지금부터라도 우리의 자녀들에게 더욱 많은 관심을 갖고 사랑으로 배려하여 밖에서 얻는 즐거움보다는 가정의 편안함 속에 행복을 느낄 수 있게 꿈이 있는 가정을 만들어 주어야겠다.
며칠 있으면 이해가 저문다. 어느 하루가 지나면 한 세기가 진다. 새 천 년을 맞을 준비에 많은 사람이 들떠 있다. 희망이나 포부도 가지각색이다. 외롭고 소외된 분들에게 시선을 돌려야 하는 것도 이해를 보내며 해야 할 우리들의 몫이다. 자손이 있어도 살아가기에 바빠서 찾아오지 못하거나 연고 없이 외롭게 병실을 지키고 있는 노인들께 넉넉한 사랑의 마음으로 즐거운 한 때를 함께 나눈다면 훈훈한 겨울바람이 우리 주위를 감돌 것이다.
잊어버리고 산 세월 속에서 잊고 지냈던 이름들도 한 번쯤 떠올려 보자. 가까이 있으면서 바쁨을 핑계로 소원했던 인연들에 새해 인사장도 준비해야겠다. 얹짢았던 기억과 상처에서 해방되어 가벼운 마음으로 웃는 얼굴로 이해를 보내는 인사를 나누자. 한해가 지지 않으면 새해를 맞을 수 없기에 아쉬움과 미련이 남아 있어도 이해와 작별해야 한다.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