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과 찬사와 불멸성 이상의 것

유숙자

살아가는 동안 단 한 곡의 음악을 선택하라면 서슴없이 베토벤의 <장엄미사>(Missa Solemnis in D major Op. 123)를 택하겠다고 말한 외국인 친구가 있다. 나는 구노의 <장엄미사>(Messe Solennelle de Sainte Cecile)에 심취해 있었기에 그의 말을 관심 있게 듣지 않았다. 교회 찬양대에서 여러 미사곡을 공연했고, 관람도 적잖이 했으나 나에게 큰 감명을 준 것은 구노의 장엄미사다. 글로리아 첫 부분 솔로의 고음은 나를 매혹했다. 성악가인 친구가 택하겠다는 단 하나의 음악, 그 말의 무게에 마음이 움직여 베토벤의 장엄 미사를 관람했다.

 

장엄미사란 성시 미사라고도 하는 미사의 한 형식이다. 이것은 가톨릭 교회의 정규 미사 이외에 성탄절이나 부활절, 혹은 교황, 추기경, 대주교의 취임과 같은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 사제가 부제와 복사 등을 거느리고 곡 연주 속에서 성가대가 답 창 하는 장엄한 규모의 노래 미사이다.

내가 처음 관람한 베토벤의 장엄 미사가 독일 드레스덴 프라우엔키르헤 콘서트였다. 성모교회의 낙성식 축하공연이다.

 

2005년 10월 30일, 드레스덴은 축제의 분위기로 가득 차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5년 2월 영국 공군의 단 사흘간의 공습으로 파괴되었던 잿더미에서 프라우엔키르헤가 새롭게 부활하여 재건 기념식을 했다. 언론들은 비로소 드레스덴이 전쟁과 파괴의 상처를 딛고 완전히 재건되었다고 평가하는 가운데 이를 기념하는 음악제가 성대하게 베풀어졌다.

2005년 11월 4일, 이 건물의 인상적인 돔 바로 아래서 첫 연주회가 열렸다. 입장권은 오래전에 이미 매진되었고 라디오 방송국에서 이 공연을 전 세계 14개국에 중계했다. 드레스덴 프라우엔키르헤 재건 콘서트. (Concert for the Reopening of the Dresden Frauenkirche) 성모교회가 재건되어 공식적으로 축성된 지 불과 일주일 뒤였다.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의 음악감독인 파비오 루이지의 지휘 아래 드레스덴 국립 오페라 합창단과 솔리스트 카밀라 닐룬드, 비르지트 렘머트, 크리스티앙 엘스너, 르네 파페가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 받는 영광을 누렸다. 이 공연은 음향 조건이 아직 검증되지 않은 장소에서 이루어진다는 어려움이 있었다. 새로 재건된 성모교회에서 열릴 첫 연주회에 이 작품이 선정된 것은 무엇보다도 곡에 내재한 상징적인 힘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 비춰볼 때 이 자리에서 베토벤의 장엄미사가 공연된 것은 참으로 사리에 맞는 일이었다.

 

많은 진통 속에서 태어난 이 미사곡은 베토벤의 어떤 작품보다도 훨씬 더 오래된 전통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 소나타 양식에서 자라난 심포니즘의 웅대함과 다이내믹한 박진력을 지니고 있는, 고대와 현대적 스타일의 일대 혼합 곡이다.

시작부터 강렬하다. 절규하듯 외치는 합창 키리에는 호소가 아닌 강조이다. 온몸에 전율이 인다. 처음부터 음악이 어찌 이리 웅장할 수 있을까. 합창이 시작되면서 테너를 시작으로 솔리스트들이 파도치듯 넘나드는 음악의 응답이 매우 감동적이고 엄숙하다.

 

각 파트의 독창이 이어지면서 ‘키리에 엘에이존 크리스테 엘에이존’을 강렬하게 반복한다. 간간이 클라리넷의 선율이 곡을 수려하게 이어간다. ‘하늘엔 하나님께 영광 땅엔 평화’ 중후한 베이스의 열창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찬미하며 흠모하나이다. 주의 영광이 크시기에 감사하나이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나이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성부, 성자, 성령께 영광. 아멘.’ 신앙 고백서이고 확신 있는 믿음의 고백이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엄숙히 노래하고 내적 평안의 확신과 기도가 강렬하게 퍼져 흥분과 감흥을 자아낸다.

 

베토벤의 신앙은 어떤 특정한 교파와 무관했으나 장엄 미사를 창조할 수 있었던 것은 유일한 분이신 전능자에 대한 외경과 기도와 절규가 영혼 깊숙이에서 독백으로 토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장엄 미사는 연주자들에게뿐만 아니라 감상자들에게까지 종교적 감정을 일깨움은 물론 영원한 믿음을 심어주려 했다.”라는 베토벤의 고백은 그 자신 속에 그러한 깊은 종교적 감정이 고여 있었음에 연유되었다. 눈물 흘리며 들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작곡자의 음악이 나의 영혼 깊숙이 내재해 있는 근원적 종교감정을 일깨웠기 때문이다. 이것은 기쁨이나 슬픔에서 표현되는 감정과 다른, 전능자에게 감사하고 싶은 눈물이며 예술적 감동의 극치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흐름이다.

 

베토벤의 제1 미사 ‘C’ 장조(Missa Solemnis Mass in C Major Op.86)는1807년에 완성되었다. 종교 음악 부분에서 높은 예술성을 보였으나 뜻밖에 평가가 낮아 만족스럽지 못했다. 언젠가는 또 하나의 미사곡을 써야겠다고 구상하고 있었는데 그 계획을 앞당기게 될 계기가 마련되었다.

 

베토벤이 그의 제2미사곡인 장엄미사를 쓰기 시작한 것은 1818년 친구이자 후원자이며 가장 고명한 제자이기도 했던 루돌프 대공이 오르미츠 교구의 대주교가 된다는 소식을 듣고부터다. 취임 미사에서 연주할 미사곡을 쓰겠다는 계획으로 시작했으나 작곡의 진척은 뜻밖에 늦어졌고 결과적으로 베토벤은 이 작품의 완성을 위해 무려 5년이라는 긴 세월과 씨름해야 했다.

베토벤 자신이 최고작으로 평가한 장엄미사는 종교적 교향곡으로 불릴 만큼, 성악가들이 기악적 성악 부분을 처리할 수 있어야 연주할 수 있었다. 베토벤은 교회 음악을 많이 쓰지는 않았지만, 이 장엄 미사에 관해서는 좋은 작품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베토벤은 첼터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작품은 오라토리오로도 연주할 수 있습니다.”라고 썼다. 미사 ‘C’ 장조를 지금까지 행해지지 않았던 수법으로 작곡했지만, 이 장엄미사도 단순한 미사곡 이상의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본다. 그가 이 곡에서 헨델의 합창곡 오라토리오 메사이어 식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아뉴스 데이에서 ‘도나 노비스 파쳄’에 주어진 선율은 메사이어의 할렐루야 코러스 중 ‘또 그가 길이 다스리신다. 영원히’의 선율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파울 베커는 ‘장엄미사에는 예배 의식에 대한 갖가지 직접적인 관여가 포기되고 있어 베토벤은 교회와 세속 사이에 장벽을 무너뜨렸다. 그의 눈이 가는 곳이 자기의 교회다. 그는 자신의 제단을 세속의 한가운데에 쌓았다. 종교적인 울타리를 그는 참지 못했다.’라고 분석했다. 베토벤 친구이자 최초의 전기 작가 안톤 쉰들러에 의하면 베토벤이 이 작품을 착수했을 즈음 그는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한다. ‘나는 이전에도 이후에도 이때처럼 완전히 세상을 초탈한 베토벤을 결코 본 적이 없었다.’라고 말했다. 베토벤이 뫼들링의 하프너 하우스에 살 때 쉰들러는 자주 그를 방문했다. 이때 베토벤의 가정적 상황은 최악이었다. 사흘이 멀다고 가정부가 교체되었고, 어떤 때는 돈이 없어 비스킷과 맥주 한 잔으로 끼니를 때워야 했다.

 

1819년 8월 말쯤 쉰들러는 빈에 사는 음악가 요한 호르칼차와 함께 베토벤의 집을 방문했다. 들어가자마자 아침나절에 하인들이 도망가버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전날 저녁, 두 하녀가 베토벤을 위해서 음식을 준비했지만, 곧 식사하지 않아 기다리다가 잠이 들었다. 뒤늦게 식사를 하려던 베토벤이 음식 맛이 먹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으므로 한밤중에 모든 이웃이 잠이 깰 정도로 대판 싸움이 벌어졌다는 사실도.

‘거실에서, 우리는 잠긴 문 뒤쪽에서 베토벤이 <크래도>의 푸가 부분을 노래하는 소리를 들었다. 노래하며 울부짖고 발을 구르며 절규하는 외경스러운 장면에 오래도록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장엄 미사는 이런 역경 속에서 쓰이고 탄생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이 장엄 미사처럼 저주스런 환경에서 생긴 예술 작품은 없을 것이다.’라고 쉰들러는 비참했던 상황을 표현했다.

 

예술가의 창조작업은 세속에서 벗어나 동떨어진 별세계에서 살아야만 이루어지는 것 같다. 위대한 작품의 창조행위에선 그것이 많은 예술가에게 본질적인 특징이 되어 있지 않나 싶다. 그들이 그렇게 엄청난 대가를 지불한 덕택에 우리가 편안히 음악을 감상하며 즐길 수 있으니 두고두고 감사할 일이다.

 

장엄미사는 1820년 3월 9일에 거행된 루돌프 대공의 대주교 의식에 사용치 못하고 베토벤이 52세가 되던 1823년에야 완성되었다. 이 곡이 초연된 것은 1823년 4월 18일 페테르부르크에서 가리친 황태자의 공식방문 미사에서였다. 공중 앞에서 초연은 1824년 5월 7일 케른트 에르토르 극장에서 그의 제9교향곡도 함께 초연하여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당시 황제가 들어올 때도 3번밖에 손뼉을 치지 않는 것이 관습이었는데 베토벤에게는 5번이나 앙코르 되어 경찰이 제지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건 그 미사곡 속에 영감과 종교적인 진정한 기쁨을, 인류에의 강한 사랑을 담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창조된 음악을 통해 그는 인류에게 종교적 감정을 일깨우고 영원한 믿음을 심어 주려고 했다. 베토벤은 친구 칼 페테즈에게'내가 이제껏 작곡한 가장 위대한 작품'이라고 고백했다.

 

장엄미사를 작곡하기 전, 베토벤은 신의 존재를 확신하지 않았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매달린 유대인에 불과하다”는 외침 때문에 경관에게 미행을 당하기도 했다. 부패한 종교에 대한 강한 반감과 의분과 혁신적인 생각이 있었다. 그런 종교관에서 착상된 것이 장엄 미사이고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은 범 종교성과 종교를 초월하는 독특한 베토벤 적 신앙고백이 깃든 작품으로 만들었다.

가톨릭 음악의 권위자인 펠러도 ‘정신에 있어서나 형식에 있으나 전례적이 아니다.’라는 말을 했다. 이런 의미에서 이 미사곡은 헨델의 메사이어의 경우와 같다. 종파에 구애받지 않은 베토벤 개인적인 열렬한 신앙고백이 이룩한 찬란한 구원의 미사라고 평가할 수 있다.

 

'명성과 찬사와 불멸성 이상으로 인간에게 주어질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완전히 세상을 초탈한 상태에서 만들어진 위대한 작품 장엄미사. 베토벤은 영혼의 허기, 텅 빈 충만을 맛보았을 것이다. 세상에서 얻은 많은 것 그 이상을 이제는 신에게서 찾고 싶었을 것이리라. 전능 자에게 귀의한 사람만이 누리는 평안함이 그의 영혼을 충만케 했으리라.

마음에서 비롯되어 마음으로 돌아가는 길. 마침내 그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신앙의 고백.

아!, 음악은 신이다.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