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인이 되기 위하여                                                                                                                                                                                                                              유숙자

산행을 시작한 지 몇 달 되었다. 집 근처 그리피스 산을 오르는 것이다. 등산이 건강에 얼마나 좋은가를 시처럼 읊어주는 친구의 권유로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나를 위해서라기보다 친구의 정성스런 권유가 미안해서 체면치레로 한 두 번 응해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먼동이 트기 시작하는 새벽에 산을 오르는 친구와 보조를 맞추자니, 올빼미처럼 밤새 눈을 말똥거리고 있다가 새벽녘이 되어야 잠이 드는 나로서는 우선 일찍 일어나야 한다는 것부터 고행이었다. 전에는 가끔 산행했으나 근래 피했던 것은 몇 년 전의 공포가 아직 남아 있어서이다.

 

남편이 회원으로 있는 산악회는 절친한 고교 동기들의 친목 모임이다. 매주 토요일마다 산에 오르는데 때로 멀고 험한 곳까지 코스를 잡는다. 그들에게 산행은 종으로 횡으로 이어져 있는 동창들의 소식을 주고받는 열린 소식의 창구이며 산행에서 얻는 또 다른 삶의 체험을 주고받는 활력의 장이기도 하다.

그들이 산행하며 한결같이 바라는 것이 부인들의 동참이다. 지성이면 감천, 어느 날인가 우리는 그들의 애타는 청을 들어주기로 작정했다.

 

날씨도 화창한 4월 첫 토요일, 다른 때보다 도시락을 더 잘 준비해서 집합 장소로 갔다. 그날따라 무심한 남편님들은 부인들이 동행한다는 것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 듯 난코스를 택해 길이 험했다. 등산로를 따라가면 좀 돌게 되니까 남자들은 가파른 곳을 익숙한 솜씨로 휙휙 나르듯 질러갔고 처음인 부인들도 모두 힘들어하면서 잘 따라갔다.

 

문제는 나였다. 얼떨결에 나무뿌리를 잡고 큰 돌을 요령껏 딛고 올라가다가 얼마나 남았을까 하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1메타쯤 남아 있었다. 이번에는 아래를 내려다보니 지금까지 걸어왔던 좁은 길은 보이지 않고 그 밑 계곡, 천야만야한 낭떠러지만 보였다. 순간 정신이 아찔해지며 손이 뿌리를 잡고 있는지 발이 바위를 딛고 있는지 감각이 없어졌다. 낭떠러지에 떨어져 누워 있는 내 모습이 얼핏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밑에서 나를 지켜 보고 있던 대원과 먼저 올라가 있던 사람들의 구조로 위기를 면했으나 현기증이 나고 힘이 빠져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 이후, 등산화와 등산복을 아예 눈에 띄지 않게 깊숙이 넣어 두었다. 남편이 배려 없었음을 사과하고 이번에는 쉬운 코스라고 매 토요일 집을 나설 때마다 나를 설득했으나 응하지 않았다. 겨우 한 번 따라갔다가 매우 놀란 것은 사실이나, 그보다도 새벽에 잠이 드는 잠버릇 때문에 일찍 일어나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다른 부인들도 이래저래 산행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런 일이 있었기에 내가 스스로 산행을 시작했다는 것은 남편이 생각할 때 하나의 사건이다.

 

그리피스 산을 처음 오르던 날, 친구는 꽤 신경이 씌는 듯 몇십 미터를 가다가는 괜찮겠냐고 계속 물었다. 내가 허리디스크로 고생하고 있는 것을 알기에 조심스러워 하는 눈치다. 즐거워야 할 산행이 친구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것이 아닐까 싶어 힘들어도 내색하지 않고 잘해냈다. 짐짓 내게 두 시간 거리의 산길은 쉬운 일이 아니다. 완만한 길도 있으나 가파른 언덕과 비탈도 많아 몹시 숨이 찼다. 한 두어 달이 지나면서부터는 산의 정기를 듬뿍 받아서인지 전처럼 힘들지 않고 정신이 맑아져 내려올 때는 온몸 구석구석에 활기가 넘치고 발걸음도 가벼웠다. 웬만한 운동은 어렵지 않게 하던 시절도 있었건만 그동안 몸 관리를 게을리했던 탓과 세월의 흐름에는 어쩔 수 없음을 실감한다.

 

둘이서 걷기에 좋은 등산로 갓길에 개나리 같은 야생화가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저절로 피었다고 하기에는 질서 정연하게 늘어선 야생화가 이른 봄부터 초여름까지 피고 지기를 거듭해 등산객에게 즐거움을 준다. 끝없이 이어지는 산길을 걷고 있노라면 섬 전체가 노란 유채꽃으로 덮여 봄 한 철 장관을 이루는 제주도가 생각난다. 닥터 지바고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노란 수선화 꽃과 함께 오롯이 피어나는 라라의 환영을 찾아 꽃물결 속을 헤쳐가던 지바고의 모습이 노랗게 피어오른다.

 

바위 틈새를 비집고 나온 이름 모를 보라색 방울꽃과 가지각색의 풀꽃들이 맑은 미소로 맞아준다. 애써 찾는 자에게만 반기려는 듯,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셀 수 있는 꽃잎이 마치 정교한 솜씨로 빚어 놓은 것처럼 보인다. 보살펴 주는 사람 없어도 때를 따라 묵묵히 피고 지는 아름다운 자연의 순응자들을 보며 만족을 모르고 불평 속에 사는 인간의 삶을 생각하게 된다. 산은 작은 풀꽃에서부터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더 할 수 없이 쾌적함을 선사해 준다.

 

산 중턱쯤 깊은 계곡이 맞닿아 있는 곳이 그리피스 산에서 가장 정기가 센 곳이라고 한다. 서기가 감도는 듯, 계곡 깊숙한 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찬 공기에 섞여 있는 향기. 이제까지 어느 곳에서도 느껴보지 못했던 향긋하고 시원한 나무의 향기가 머리를 맑게 한다. 깊이 숨을 들여 마시고 양팔을 벌려 기를 안으로 모으라고 친구가 일러준다. 사실이건 아니건 간에 나는 이 동작을 즐겨 반복한다. 팔을 더 크게 벌려 내 안에 있는 정신적, 육체적 불순물인 허욕, 불평, 이기, 교만을 열심히 쏟아 낸다. 자연 앞에서 덜 부끄럽기 위해.

 

산 정상에 평평하고 넓은 공지가 있다. 여기서 펼쳐지는 아침의 열림이 다른 세상을 보는 것 같다. 여명 속에서 기지게 켜는 나뭇잎들과 새들의 지저귐. 그것은 새벽이 잠을 깨는 소리 같다. 삶의 비밀스러운 속삭임이 수런대는 부드럽고 신비에 찬 소리 같다.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는 도시의 모습이 장관을 이룬다.

 

안개에 잠겨있는 도심지의 빌딩이 전설의 성처럼 희미한 모습을 드러낸다. 안개가 거대하게 흐르고 있어 고요의 바다에 도시가 침잠된 듯싶다. 북쪽 산에서 아스라이 피어오르는 물안개가 산허리를 휘감아 한 폭의 수묵화를 보는 것처럼 신비하고 경이롭다. 연둣빛 신록 사이로 바람에 실려 가는 안개의 무리가 서서히 오르다가 이내 사라진다. 잠시 머물다 가는 인생, 저 안개처럼 우리도 잠적하리니-. 착잡한 감상이 인다.

 

아직 사람들의 발자국이 닿지 않은 이른 아침에 신선한 공기를 마음껏 호흡하고 만끽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짐에 감사한다. 운동 중에 가장 좋은 것이 유산소 운동이라 하지 않던가.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맑고 깨끗한 공기를 마시며 나무들이 뿜어내는 초록 기운으로 삼림욕을 하며 새소리 바람 소리와 벗하기에 일거양득인 셈이다. 산의 정기를 한 아름 간직한 체 초록빛 바람 따라 산행을 하고 온 날은 몸에서 신선한 산 냄새가 향기처럼 어린다.

 

자연인이 되기 위하여 꾸준히 산에 오를 것이다. 그곳에 가면 다른 세상을 만나게 된다. 나무와 풀들의 속삭임을 들을 수 있고 자연의 신비와 만물을 창조하신 조물주에 대한 외경이 생긴다. 사계절 변함없이 우리를 넓은 가슴에 품어주고 기다려 주고 무한한 가능성과 삶의 지혜를 주는 곳이기에 오르고 싶은 충동이 인다. 잠을 자면서도 나는 산에 오르는 꿈을 꾼다.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