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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가 / 박목월  

 

     

뭐락카노, 저 편 강기슭에서 

니 뭐락카노, 바람에 불려서

 

이승 아니믄 저승으로 떠나는 뱃머리에서 

나의 목소리도 바람에 날려서

 

뭐락카노 뭐락카노 

썩어서 동아 밧줄은 삭아 내리는데

 

하직을 말자, 하직을 말자 

인연은 갈밭을 건너는 바람

 

뭐락카노 뭐락카노 뭐락카노 

니, 흰 옷자라기만 펄럭거리고…….

 

오냐, 오냐, 오냐. 

이승 아니믄 저승에서라도…….

 

이승 아니믄 저승에서라도 

인연은 갈밭을 건너는 바람

 

뭐락카노, 저 편 강기슭에서 

니 음성은 바람에 불려서

 

오냐, 오냐, 오냐.

나의 목소리도 바람에 날려서.  

 

- 시집 『경상도의 가랑잎』(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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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의 인연과 긴 이별, 그리고 죽은 이에 대한 그리움을 마치 살아있는 사람을 앞에 두고 이야기하듯 노래한 시다. 요단강 아니면 장한강, 장한강 아니면 낙동강 저 피안의 강변에서 나누는 대화다. 하지만 떠나는 뱃머리에서 나를 향해 ‘뭐라카는’ 그의 말은 ‘바람에 불려서’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다. 뭐라고 하는지 잘 들리지 않는다. 그를 향한 나의 외침도 ‘바람에 날려서’ 그에게 닿지 못한다. 하지만 이 시에서 ‘바람’은 삶과 죽음을 아련하게 이어주는 매개체 구실을 한다. 그리고 이승에서 못 다한 인연은 저승에서도 이어나가리라는 믿음을 넌지시 암시함으로써 죽음은 단절이 아님을 깨닫게 한다. 이승에서의 '동아 밧줄이 삭아 내리는' 것으로 인연이 간단히 소멸되지는 않는 것이다. 

 

 죽음은 문학의 양식이 존재한 이래 가장 널리 노래되는 문학 소재이다. 그것은 아마 우리에게서 삶 못지않게 죽음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누구나 죽는다는 그 필연의 사실로 말미암아 우리 삶이 더욱 깊어지기도 할 것이다. 우리 모두는 근원을 알지 못하는 인연의 줄에 이끌려 각자의 생을 얻어 주어진 삶을 살아간다. 또 언젠가는 반드시 찾아올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살아가면서 많은 이별을 겪는다. 옛말에도 있듯이 죽음은 언제나 내 안에 있으며, 대문 밖이 바로 저승인 것이다. 어머니의 화장을 기다리면서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저승과 이승 사이를 가로막은 벽이 그렇게 얇은 줄은 미처 몰랐다. 벽이 쉽게 허물어지자 죽음의 문턱도 사라지고 이내 이승과 저승은 하나가 되었다. 

 

 크리슈나무르티는 ‘처음부터 끝까지 삶과 죽음은 하나’라고 했고, 노무현 대통령이 남긴 유서에도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이란 말이 있다. 둘 가운데 하나를 떼어낼 수 없고 따로 떼어서는 이해되지 않는 것이 삶과 죽음인 것이다. 크리슈나무르티는 삶의 모든 것을 뚜렷이 인식하기 위해서는 ‘시간, 슬픔, 그리고 죽음’을 깊이 이해하라고 조언한다. 시간을 이해하고, 슬픔의 중요성을 인식하며, 죽음과 함께 하는 모든 것들은 사랑에서 비롯됨을 안다. 죽음은 삶의 매순간 여기에 있다. 어머니 유골단지에서 '오냐, 오냐, 오냐' 소리가 바람에 날려 메아리로 들리는듯했다. 삶과 죽음을 뛰어넘는 인연과 재회의 성가도 들린다. 하지만 ‘이승 아니면 저승에서라도' 모두 다시 만날 것이다. 엄마, 하늘하늘 흰옷자락 펄럭이는 모습 내 눈앞에 사라져도 우리 아주 하직은 맙시다.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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