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묻는 독자에게> / 임보

 

 

오늘 아침 메일 박스를 열었더니 ‘시가 어떤 글인가?’를 묻는 당신의 편지가 기다리고 있더군요.
당신의 물음을 계기로 해서 잠시 시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 평범한 것 같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결코 쉽지만은 않군요. ...
한평생 시를 써 온 소위 시인인, 그리고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시를 가르치고 있는 시학 교수인 내가 선뜻 대답을 못하니 실망하셨나요?

어디 시뿐이겠습니까?
이 세상에 존재한 모든 사물들의 실체를 정의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아니 불가능하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모든 사물들은 끊임없이 변모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긴 세월을 놓고 보면 큰 바위도 언젠가는 미세한 모래알들로 부서져 내리고,
태산준령도 허물어지고 가라앉아 물속에 묻히기도 합니다.
자연이 이렇거늘 하물며 사람들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문화라는 것들은 얼마나 덧없이 변하겠습니까?
10년이 못 가서, 아니 1년을 채 기다리지 못하고 바뀌는 것도 얼마나 많던가요?

시 역시 시대와 지역에 따라 끊임없이 변모해 오고 있습니다.
이백(李白)과 소월(素月)의 시가 얼마나 다르며, 소네트(sonnet)와 향가(鄕歌)는 얼마나 거리가 있습니까.
아니 나라마다의 시가 서로 다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같은 나라의 시에서도 시대에 따라 개인에 따라 천차만별 다르게 마련입니다.
글을 쓰는 경향 역시 시대의 요구나 개인의 욕망에 따라 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시를 포함해서 이 세상의 모든 사물에 대한 정의는 항구적인 것이 아니라 잠정적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들 정의는 일반적이기보다는 국부적이며, 보편적이기보다는 특수적이며, 객관적이기보다는 주관적인 것에 기울기 때문입니다.
비근한 예를 들어볼까요.
누가 ‘사과’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고 칩시다.
‘사과는 새콤하게 맛있는 주먹만한 크기의 빨간 과일이다.’
이 정의는 얼핏 보기엔 사과의 특성을 간결하게 지적해 낸 것 같지만
세상의 모든 사과를 아우를 수 있는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정의가 되지 못합니다.
세상엔 빨간 빛깔 이외의 연두빛이나 노란빛의 사과도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사과의 맛을 ‘새콤하다’고 지적했는데 사과에는 그런 맛 이외의 다양한 맛들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까?
또한 크기도 사과의 종류에 따라 여러 가지여서 ‘주먹만하다’는 표현은 적절하다고 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니 이러한 정의는 일반성과 보편성이 결여된 것입니다.
더욱이 ‘맛있는’이라는 수식어는 사과를 싫어하는 사람은 동의할 수 없을 테니까 이는 주관적인 생각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시에 대한 정의에 너무 절망해 할 필요는 없습니다.
절대불면의 객관적인 정의가 어렵다는 것은 정의의 불필요성을 주장하는 견해는 아닙니다.
어느 시대 어느 한 개인의 정의가 비록 잠정적이고 주관적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그것대로 가치가 없지 않으니까요.
지금까지 수많은 문학인들에 의해 시에 대한 정의가 시도되었습니다.
멀리는 아리스토텔레스나 공자로부터 가까이는 최근의 문학이론가들에 이르기까지 시에 대한 그들의 견해를 피력해 놓은 글들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대개는 그들이 향유했던 당대의 시나 그들이 지향했던 시에 관한 주관적 담론을 넘어서지 못한 것들입니다.
‘시에 대한 모든 정의는 오류의 역사’라고 말한 T. S. 엘리엇의 지적은 시에 대한 주관적 담론의 오류를 비판한 것입니다.
그러나 어떡합니까.
이 자리에서의 시에 대한 내 담론도 주관적 한계를 넘어서기 어려울 터이므로 새로운 오류를 하나 더 보태는 결과가 되겠군요.

지금까지 있었던 시나, 지금 있는 시들을 총괄해서 논의하기는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므로 접어두기로 하고,
앞으로 시가 이랬으면 싶은 그 ‘미래의 시’에 관해 함께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시가 갖추었으면 싶은 몇 가지 요소들을 제시하면서 당신의 동의를 얻어 가는 방식으로 논의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 시의 효용성에 관해서 생각해 볼까요.
어떻습니까? 시가 이 세상에 필요한 글이어야 한다는 생각에는 동의하십니까?
시가 읽는 이로 하여금 즐거움을 맛보게 한다든지, 생활의 한 활력소가 될 수 있다면 좋지 않겠습니까?
나는 시가 반드시 윤리적이기를 주장하는 사람은 아닙니다만, 적어도 시가 세상을 어지럽히는 글이어서는 곤란하다는 생각입니다.
세상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글이기를 바랍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둘째, 심미성(審美性)에 관한 문제입니다.
시가 아름다운 글이어야 한다는 데 이견(異見)이 있나요?
시 속에 담긴 시인의 정서가 아름답든지, 표현이 아름답든지 간에 어떤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시가 예술의 자리에 머물러 있기를 바라는 한 시의 심미성은 필요조건입니다.
만일 아름다움을 거부한 시가 있다면 이는 엄격히 말해 예술의 반열에 낄 수 없는 잡문에 지나지 않습니다.

셋째, 함축성에 관한 얘깁니다.
시의 분량은 역시 길지 않고 짧다는 데 그 특성이 있습니다.
서사시나 극시와 같은 긴 형식의 시가 과거에 없었던 것은 아니나,
이들은 소설이나 희곡문학으로 발전한 것이니까 시의 범주로 다루기는 적절치 못합니다.
시는 산문문학과는 달리 표현의 압축 곧 간결미를 추구합니다.
비약적인 전개, 설명보다는 암시, 그리고 생략 등의 기법을 즐겨 사용하는 것은 시의 이러한 특성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넷째, 운율에 관해서 생각해 볼까요.
시가 운문이라는 것은 시의 전통적 특성입니다.
그런데 근래에 자유시가 등장하면서 운율에 대해 그릇된 인식을 가진 시인들이 없지 않아 보입니다.
자유시는 정형시의 틀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이지, 운율로부터도 해방된다고 생각하면 이는 큰 오산입니다.
시가 운율을 떠나면 산문이 되고 맙니다.
물론 산문시라는 것도 있기는 하지요.
그러나 산문시도 운율을 담고 있을 때만 시의 범주에서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의 흥은 운율에서 일어납니다.
글쎄요. 자신의 작품이 흥겹게 읽히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라면 운율을 소홀히 다룰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렇더라도 운율을 떠난 시는 마치 성전환을 한 인물처럼 본성을 잃은 것 같아서 개운치가 않습니다.

앞에서 나는 네 가지 항목을 들어 바람직한 시의 틀을 얽어보고자 시도했습니다.
이들을 종합하면 ‘아름답고 짧은 유용한 운문’으로 요약되는군요.
그렇다면 이러한 조건만 갖추면 훌륭한 시가 되는 것인가?
그러나 어딘가 미진하다는 생각이 없지 않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시는 그 시인만이 지닌 개성적인 맑은 세계관에 뿌리를 두고 있어야 합니다.
좀 모호하기는 합니다만 어떤 이는 이를 ‘시정신’ 혹은 ‘시혼(詩魂)’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나는 어느 글에서 시정신을 선비정신과 동궤의 것으로 보고자 하는 견해를 밝힌 바 있습니다.
시정신은 세속적 욕망을 벗어나고자 하는 승화된 정신입니다.
그래서 나는 앞에서 ‘개성적인 맑은 세계관’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시인은 고급의 정신 영역을 향유한 사람들입니다.
나는 시인을 언어를 잘 다루는 장인(匠人)으로 보기에 앞서 하나의 구도자(求道者)로 보고자 합니다.
시는 바로 이러한 구도자에 의해 쓰인 글입니다.

어떻습니까?
시에 대한 설명이 더 번거롭게 되고 말았나요?
어떻게 해도 시에 대한 흡족한 설명은 어렵겠군요
.
역시 시는 설명할 수 없는 괴물단지인 모양입니다.
직접 쓰면서 터득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한번 써 보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