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석(捨石)/ 박무웅

 

 

할아버지에게서 처음 바둑을 배웠다

 

바둑은 두 집을 지어야 산다고 하셨다

이리저리 고단한 대마를 끌고 다녀도

한 집 밖에 남지 않으면 끝이라 하셨다

 

대마불사에 목을 걸고

집과 집, 길과 길을 이어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

 

오궁도화가 만발하여 보기 좋아도

한순간 낙화하면 끝이라 하셨다

 

세상에는 버릴 게 없다는 할아버지 말씀대로

사석을 모아들이며

한 집 한 집 키워 나갔다

길과 길을 만들어 삶을 이어 나갔다

 

판이 끝날 때마다 모아들이는 사석이

바로 나만의 묘수였다

 

- 국민일보 <아침의 시>(2008년7월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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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둑에서 의도적으로 버리는 돌을 ‘사석(捨石)’이라고 한다. 효용가치가 떨어진 돌을 버리면서 새로운 세력을 구축하거나 다른 실리를 챙기는 ‘사석전략’이란 게 있다. 바둑의 고수들은 어떤 돌이 앞으로 더 큰 가치가 있고 가치가 덜 한지를 정확히 판단하고 상대적으로 가치가 적은 돌은 과감히 버림으로써 반드시 더 큰 대가를 얻는다. 그러나 하수들은 버릴 돌과 살려할 돌을 구분하는 능력이 떨어지고 버리는 게 아까워 모두 살리려 하지만 결국에는 대마를 죽이고 판을 넘겨주는 것이 일반적이며 그들의 한계이다. 그래서 나온 바둑교훈이 작은 것은 버리고 큰 것을 취하라는 뜻의 ‘사소취대(捨小就大)’이다.

 

 바둑에는 그 말고도 숱한 격언과 교훈이 있다. 그 가르침들은 바둑판에만 국한하여 통용되지 않고 곧잘 삶의 지혜로 응용된다. 인생을 비롯해 정치나 경영에 두루 써먹어도 들어맞는 까닭은 바둑이 세상의 축소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반상에서의 경륜과 체득에 바탕을 둬야하는데, 왕창 사들인 책을 통한 벼락치기공부로 1급 수준에 도달한 안철수 씨에게서 보았듯이 작위적으로 바둑에서 정치원리를 구하고자 한다면 판판이 깨지고 말 것이다. 정치는 경영과는 또 다른 복잡한 변수가 작동한다는 사실도 그는 간과했다. 부분적인 이익보다 전체 국면을 보는 눈이나 상대의 급소를 내가 먼저 선점해야 편해진다는 지혜도 바둑에서 가르치고 있다. 

 

 바둑의 1교훈인 ‘너무 승부에 집착하다보면 오히려 그르친다.’는 ‘부득탐승(不得貪勝)’이란 말도 있다. 하지만 숱한 바둑격언에 앞서 상대가 있고 장벽이 있는 상황에서 뜻대로만 되지 않는 게 세상사이고 정치이며 게임이 아닌가. 이창호가 오랜 기간 1인자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을 무렵 “앞으로 어떤 바둑을 두고 싶냐?"고 한 기자가 물었다. 그는 "승패를 떠나서 단 한번만이라도 실수 없는 바둑을 둬보고 싶다."고 대답했다. 지금은 이세돌에게 그 자리를 물려주었지만 천하의 이창호도 바둑을 두면서 매번 실수를 했다는 뜻이고, 승리의 기쁨보다는 그 실수가 내내 마음에 걸렸다는 고백이다. 바둑이든 정치든 뭐든 완벽은 불가능하고 누구나 실수는 하기 마련이다.

 

 중요한 것은 같은 실수를 하지 않으려는 다짐과 행동이고, 문제의 해결능력이다. 한때 '미생'이라는 드라마가 화제였다. 바둑에서 '미생'은 아직 온전히 살지 못하고 생사가 불투명한 돌을 일컫는다. 그러니까 '이리저리 고단한 대마를 끌고 다녀도' '두 집을 짓지' 않으면 살아있는 돌이라 할 수 없다. 미생마가 많으면 신경이 쓰이고, 신경을 곤두 쓰다보면 삐끗 실수를 하여 한꺼번에 대마가 죽는 불상사가 벌어지기도 한다. 이 지점에서 윤상현의 욕설 파문과 박대통령의 모습이 포개어져 어른거리는 건 어인 까닭일까. 반인륜적 행동으로 민심을 잃고 결국 사면초가에 빠져 달리지 않는 오추마 위에서 최후를 맞는 초한지의 항우도 생각난다. 윤상현을 버리지 않을 경우 같은 운명을 맞을 수도 있다.

 

 어쩌면 그들의 대마가 무너지는 불상사가 다른 쪽에게는 반사이익이 되기도 하고, 결국 국가와 국민들에게도 나쁘지 않을 수도 있겠다. 그러니 그들의 걱정은 그들이 알아서 하면 되는 일인데, 그보다는 이세돌의 남은 대국이 흥미를 더하는 가운데 슬슬 신경이 쓰인다. 인터넷과 처음 인연을 맺은 게 20년 전 바둑을 통해서였고, 늘지 않은 5급 실력에 돌을 잡아보지 못한지 10년도 더 되었다. 바둑 그 자체보다 솔직히 알파고 인공지능에 대한 남들과 같은 호기심으로 1차전을 관전하였으나 결과가 주는 충격은 생각보다 컸다. 인공지능의 미래는 곧 인류의 미래를 의미한다. 그들이 활개 치는 세상에서 '길과 길을 만들어 삶을 이어 나갈' 수 있을지 걱정이다. 남은 경기에서 이세돌은 인류의 편에서 침착하게 돌을 하나 하나 놓아주길 바란다.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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