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가방 / 조미순
그래, 가슴속에 꾹꾹 눌러왔던 이야기를 꺼내보려 한다.
어제는 내 기일이었지. 한 상 차려준 음식 맛나게 먹었다. 울산 바닷가 덕장에서 사 온 건가자미 맛은 일품이더라. 네가 친정 나들이 때마다 까탈스런 아비의 입맛에 맞춰 주곤 했지. 이런! 또 군침이 도는걸.
친정에서 아침을 맞은 게 삼 년 만이지? 어미가 혈액암 치료 중일 때 신종감염병이 지구촌에 휘몰아쳤잖니. 기저질환이 있는 네 엄마는 코로나 백신을 맞을 수가 없었어. 사람들과 접촉을 피하는 게 최선의 안전법이었다. 너는 친정까지 장거리 운전을 해 와 어미 얼굴만 잠시 보고 가곤 했어. 그것도 문밖에서. 대문간을 넘어설 날을 초조하게 기다렸지.
순아, 너는 아침부터 팔을 걷어붙였구나. 구순의 네 어미가 깃들어 사는, 낡아서 문틀이 내려앉는 집에서 말이야. 해 뜨면 버섯재배장에 나갔다가 해거름에 귀가해 밥 한술 때우면 지쳐서 잠이 드는 일상이 고인 곳. 그런 하루하루를 보내느라 집 정리 정돈은 사치였음을 너는 알고 있었지.
구석구석 거미줄을 걷고, 바닥에 나뒹구는 물건을 정리하고, 계절이 뒤섞인 옷 무더기에서 사계를 분류해 서랍장에 넣더구나. 집안 대청소를 하다가 너는 까만 서류 가방을 발견했어. 장롱 구석에서 희뿌연 먼지옷을 입은 그것을.
“가방이 와 거기 있노. 너 아바이가 아끼던 거라 태워준 줄 알았데이.”
아마 네 엄마는 가방에 뭐가 들었는지 모를 거야. 중요 서류를 넣어뒀다고 손대지 말라 일렀거든. 그런 상황이 네 호기심을 자극했더구나. 마치 내 속내를 엿볼 기회라도 되나 싶어 가방을 열어본 게지.
가계부와 일지, 버섯거래 서류, 공과금 용지들. 너희가 선물해 준 시계며 접부채 같은 것들. 혹시 잃어버릴까 봐 옷핀에 끼워 보관한 반지며 넥타이핀…. 가방을 살피던 네 표정에 당황한 빛이 어리더라.
“이런 면이 있는 줄 몰랐어.”
너는 혼잣말을 했지. 꼼꼼하게 분류해 철한 서류와 일지 내용을 훑어보면서. 오래 사용했음에도 깔끔한 소품들도 신기한 듯 만졌지. 생각해 보니 내가 살아오면서 너희에게 보여준 모습이 미움으로 점철될 수밖에 없었다.
젊을 때 세탁소를 차려놓고 나는 집 밖으로 나돌았다. 자식들 뒷바라지만도 버거운 아내에게 손님 옷 다림질이며 세탁물 빨래까지 맡겼지. 네 엄마는 힘들어했어. 나는 엇나갔다. 술에 취하면 손찌검도 했다. 버섯농장을 할 때는 나름 열심히 살았던 것 같은데…. 너희들 마음에 원망의 골이 깊더구나.
가자미 얘기 잠깐 들어주겠니? 가자미 치어는 부화 당시에 머리 양측에 눈이 한 개씩 있어. 그때는 다른 물고기처럼 표층 가까이 헤엄치며 살아. 그러다 왼쪽 눈이 머리 배면을 돌아 오른쪽으로 접근하면 눈이 한쪽으로 몰리게 된단다. 치어는 몸의 오른쪽을 위로해 바닥에 붙어서 살지. 몰린 눈으로 사물을 보고 세상을 보면서.
사실 나도 가자미눈으로 세상을 봤다. 내 아버지, 할아버지께 배운 대로 행동한 거야. 남자는 하늘이고 여자는 땅이라더라. 그러니 아내를 귀히 여기고 챙겨야 할 이유를 몰랐지. 자식은 소유물이었고 특히 ‘지지바’는 잘 키워봤자 남의 문중 사람이 된다며 관심 밖이었다. 내가 너에게 중학교만 나와도 된다고 말한 건 그 때문이야. 그런데 너는 인문계 고교로 진학해 대학까지 가겠다고 버티더라. 네 황소고집이 이겼어. 못 배운 한을 품고 살던 어미가 밤샘 짜깁기로 번 돈이 학비로 쓰였으니. 그나마 그걸 방관한 것, 내 나름의 배려였다.
여든 중반 나이에 접어들자 병이 내게로 왔다. 늘 건강했기에 쉬 회복되려니 낙관했었다. 내가 병원을 찾던 날, 그날 바로 대구의 대학병원으로 이송될 때 간담이 서늘하더라. 급성 백혈병이 나를 벼랑으로 내몰았어. 네 오라비와 너, 그리고 막내가 장거리 병간호를 했지. 나날이 뜬눈으로 간병해야 할 만큼 증상은 심해졌다. 너희들 고생이 말이 아니었다. 어느 날 주위의 환자들이 내게 그러더라. “얼마나 좋은 아비였으면 자식들이 저리 잘할까.”라고. 그때부터였을거야. 내가 지나온 삶을 돌아보기 시작한 것이.
대학병원에 더는 있을 수 없었어. 의사가 나를 포기했으니까. 하지만 구급차에 실려 시골 병원으로 돌아오면서도 나는 삶을 움켜잡고 싶었다. 집에 가면 병이 나을 것 같다고 고집을 부리기도 했지. 물론, 언제 쇼크 상태에 빠질지 몰라 허락되지 않는 바람이었다. 나는 마침내 미뤄둔 숙제를 할 때라는 걸 예감했어.
“평생 못난 남편으로 살았네. 참 미안타.”
손마디가 휘고 수세미처럼 거친 손이 힘없이 늘어진 내 손을 감싸 쥐더라. 얼마 만인지 기억나지 않는 까마득한 체온의 나눔이었어. 눈물이 볼을 타고 줄기줄기 흘러내렸지. 긴장이 풀려서였을까. 평생 처음으로 아내에게 용서를 구한 날 내 심장이 멈춰버렸다.
네 어미의 배웅을 받으며 떠난 길, 고맙더라. 두 달 병상에 있을 때 자식들에게 받은 따뜻함도 챙겨갈 수 있어서 더더욱.
딸아, 그 가방 이제 돌려주렴. 살면서 나랑 엮인 아픔은 활활 불태워 버리고 좋은 기억만 간직하자.
자, 이제 우리 화해하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