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반어법 / 유병숙
병원 아침 식사 시간은 7시였다. 어머니 식사를 수발하러 병실에 들어섰다. 전날만 해도 비위관에 산소 호흡기까지 주렁주렁 매달고 있던 어머니가 맨얼굴을 하고 있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필시 밤새 또 줄을 잡아 빼었으리라. 비위관을 삽입하려면 매번 사투를 벌여야 했다. 정작 사고를 친 어머니의 표정은 천연덕스러웠다.
십여 일 전 숨이 넘어갈 듯 가쁘게 몰아쉬던 어머니는 119구급차를 타고 응급실로 이송되었다. 요로감염과 결석, 그로 인한 패혈증으로 죽을 고비를 한 차례 넘겼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심장으로 가는 혈관들이 막혀있어 스텐트 시술을 앞두고 있다. 무엇보다 난제는 삼킴장애였다. 연하검사를 하니 물이나 음식이 기도와 귀로 넘어가고 있었다. 흡인성 폐렴이 염려되어 경구용 음식은 금해졌고, 앞으로는 비위관을 통해 유동식으로 드셔야 한다는 판정이 내려졌다. 집에 계실 땐 식사를 곧잘 하셨기에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재활 방법이 없느냐 간청했다. 난감해하던 의사는 경구 연습용 죽을 드시게 해보자고 했다. 어머니는 누적된 파킨슨 병증으로 삼킴 능력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었다. 입원 전에는 미처 알지 못한 일이었다. 나와 동생들은 한 가닥 희망을 안고 매 끼니 수발을 들기 시작했다. 철통같은 병동에 들기 위해 코로나19 검사도 받았다. 어찌 되었든 10여 일 만에 대하는, 줄이 제거된 얼굴은 참으로 반가웠다. 나도 모르게 “엄마, 예뻐졌네!” 했다. 순간 어머니 얼굴에 노기가 번졌다. “이뻐지기는? 그런데 여기 이렇게 하고 있니?” 정색하며 버럭 화를 내었다.
인턴 의사와 간호사가 달려왔다. “방ㅇㅇ 님, 이걸 빼시면 어머님만 힘들어요.” 인턴도 힘이 드는지 환자에게 잔소리를 해댔다. 입을 꽉 다문 어머니는 비위관 삽입에 전혀 협조할 마음이 없어 보였다. “에고, 답답하셔서 그런가 봐요. 죄송해요.” 내가 거들자 인턴은 마치 임자 만났다는 듯 나에게도 한바탕 잔소리를 퍼붓는다. “한두 번도 아니고 매일 이러시면 안돼요. 보호자님이 기왕 오셨으니 잘 감시하길 바래요. 보호자가 계셔도 손목을 묶어 놓겠습니다. 풀어주면 안돼요!” 나는 속에서 까닭 모를 울화가 치미는 걸 침을 꿀꺽 삼키며 참았다. “아휴, 걱정 마세요. 제가 잘 잡고 있을 테니, 묶지 마셔요. 그냥 입으로 드시면 참 좋은데 어렵겠지요?” 인턴은 나를 노려보았다. “이걸 달지 않으면 굶어서 돌아가시는 거예요. 어떻게, 그냥 뺄까요?” 상황을 극한으로 몰고 가는 인턴의 말에 기가 막혔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어머니가 소리를 지르셨다. “병숙아, 어디 가서 나 죽는 방법 좀 알아봐라!” 나는 무색하여 “알았어요, 알았어, 엄마. 금방 알아볼게요.” 삽시간에 사방이 조용해졌다. 어머니도, 간호사도, 인턴도 놀란 듯 모두 나를 쳐다보았다. 얼떨결에 나온 내 말에 나도 놀랐다.
어머니가 죽고 싶다고 말씀하신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이십여 년 전 오랜 투병 끝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머니는 죽음이란 단어를 가급적 쓰지 않았다. 죽음이 무섭다 했다. 때론 죽기 싫다고도 하셨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당신을 흉보는 것 같아 밖에 나가기도 무섭다 해서 얼마나 울컥했던가! 천주교 신자로 신앙심이 돈독했지만, 막상 아버지와의 사별에는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 후 어머니는 당신의 건강에 지대한 정성을 기울였다. 매일 호수공원을 산책했고, 노인대학을 다니며 또래 친구들과 교류하셨다. 자동차멀미를 해서 시장도 걸어 다녔다. 당신이 아프면 자식들이 고생한다며, 해준 것도 없는데 짐이 될 수는 없다 했다. 어머니의 건강염려증에 가까운 행보가 또 다른 걱정을 불러왔지만 한편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파킨슨병이 어머니에게 숨어들고 있는 줄은 미처 몰랐다. 문인수 시인의 시구처럼 “生의 여러 요긴한 동작들이 노구를 떠났으므로, 하지만 정신이 아직 초롱 같았으므로” 안타까움이 사무쳤다.
어머니의 말씀을 돌이켜보았다. 어머니의 반어법은 때로 우리를 혼란에 빠뜨리곤 했다. 어머니는 어두육미라며 생선의 머리를 주로 드셨다. 어린 시절 우리 남매는 어머니가 진짜로 그 부분을 좋아하는 줄 알았다. 폭우가 쏟아지던 날, 위험하니 오지 말라면서도 온종일 밥상 차려놓고 기다렸던 분이다. 코로나19 여파로 증손자가 왕래를 못하게 되니, 괜찮다 하면서도 서운한 기색이 역력했다. 화상통화를 연결해드리자 “에구 요놈!” 하며 환하게 웃으셨다. 어머니가 괜찮다는 말은 많이 보고 싶다는, 무얼 하고 싶다는 말로 알아들었던 나는 이제 새로운 반어법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고비를 넘긴 어머니는 이제 죽음을 향해 정공법으로 대항하기 시작한 건 아닐까? 죽고 싶다는 말이 살고 싶다는 말로 들렸다. 어쩌면 힘든 상황에도 어머니의 반어법은 나를 지탱하게 하는 힘일지도 모른다.
잠든 어머니의 손을 놓고 일어서려는데 문득 “미안하다!” 하신다. 생경한 말씀에 돌아보았다. “미안하고 고맙다!” 힘겹게 손을 휘저으셨다. 어머니의 반어법이 이제는 힘을 잃고 있는 건 아닐까? 나는 덜컥 겁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