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달픔에 대하여 / 정희승

 

 

글을 쓰다 보면 이상하게 마음에 끌리는 단어들이 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의 경우 스무 개쯤 되는 것 같다. 그중 하나를 소개하라면 '애달프다'를 들겠다. 왠지 이 단어에는 진짜 삶이 담겨 있는 느낌이 든다. 삶의 질감을 이보다 고스란히 드러낸 말이 또 있을까?

 

'애달프다'라는 말에는 힘들었던 지난 세월이 오롯이 배어 있다. 슬픔, 이별, 외로움, 회한, 고통, 절망…. 그렇다고 그런 아픔들이 모나게 돌출되어 따끔하게 찌르지는 않는다. 시간에 숨이 죽고 발효되어서인지 그저 은은하게 내비치는 정도다. 누구나 경험으로 느끼듯 시간은 인간에게 잔인하면서도 감미롭다. 지나온 모든 것들과 떼어놓기 때문이다. '애달프다'에는 먼 곳을 향한 그리움 같은 막연한 슬픔이 어려 있다.

 

그렇다고 어둡고 우울한 정조만 드러내지는 않는다. 달콤하면서도 슬픈 고통, 그러니까 산다는 고통뿐 아니라, 이를 극복한 자의 소박한 자부심도 들어 있다. 애달픔이야말로 신산의 세월을 건너온 자의 가슴에 달아주는 일종의 훈장이 아닐까? 젊은이에게 어울리지 않는 건 이 때문이리라.

 

이 말은 또 디지털보다는 아날로그 감성과 어울린다. 그래서인지 삶의 그늘을 읽는 애정 어린 눈길에만 모습을 드러낸다. 분초를 다투는 분주한 곳에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다. 도시에서 애달픔을 느낄 기회가 적은 것도 이 때문이리라. 나 역시 극히 드물게 경험하는데,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그것도 참기름을 통해서다.

 

명절이 다가오면 본가에 내려간다. 어느 가정이나 그렇듯 올라올 때면 노모는 어김없이 참기름을 챙겨주신다. 때로 비좁은 가방에 넣기도 마땅찮아서, "다음에 가져갈게요."해도, 이게 빠지면 큰일 나는 줄 안다. 참기름은 두 홉들이 소주병에 담아야 제격이다. 가는 도중에 새지 말라고 병을 신문지로 두른 다음 그 위에 비닐봉지로 한 번 더 감싼다.

 

노모는 일제시대와 6․25 그리고 산업화 시대를 숨 가쁘게 건너오셨다. 자식들을 키워내느라 힘에 부친 일도 마다하지 않으셨다. 다른 건 몰라도 노모가 챙겨주는 이 참기름만은 도무지 거절할 수가 없다. 사실 정을 담아 보내는 데는 참기름만 한 것도 없다. "올라갈게요." 하고 인사를 드리면, 아파트 현관 앞까지 나온 노모는 "며칠 더 쉬었다 가면 좋겠구먼." 하고 아쉬워한다. 몇 발짝 걸어가다 뒤돌아보면, 그제야 살펴 가라는 손짓을 하며 어렵게 노구를 돌리신다.

 

경황없이 바쁘게 올라와 짐을 풀고 나서야 참기름을 발견할 때도 있다. 박스나 가방을 열어보면 한쪽에 어김없이 그게 끼워져 있다. 비닐봉지와 신문지를 벗겨내면, 다갈색의 끈끈한 액체가 담긴 푸른 소주병이 드러난다. 이상하게도 그 병을 들고 있으면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이 밀려든다. 필경 그 병에서 느껴지는 삶의 애달픔 때문이리라. 때로 노모의 아련한 음성이 들리기도 한다.

"지금 생각하면 그 세월을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어야. 그래도 지나고 나니 다 추억이 되더라."

 

왜 우린 유난히 고소한 향에 열광하는 걸까? 사실 참기름이 안 들어가는 요리를 찾아보기 어렵다. 모두가 무겁고 진한 이 향을 좋아하는 것은, 그게 몸과 마음, 더 나아가 영혼까지 진득하게 감싸주는 삶의 베이스노트(base note)이기 때문은 아닐까?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 뒤로 6차선 도로가 지난다. 횡단보도를 건너 아파트 입구에 이르니, 오늘도 이팝나무 아래 예의 할머니가 앉아 있다. 조금 오랜만에 나온 것 같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넓은 들이 있는데, 그 접경 지역에 사는 분으로 안다. 할머니 앞에는 으레 고추, 애호박, 쪽파, 토란, 깻잎, 호박잎 등속이 놓여 있다. 가을에는 녹두, 햇밤, 대추도 보인다. 오늘은 시골된장, 참기름 세 병, 얼갈이배추 몇 단과 상추를 가지고 나왔다.

 

주말에는 모든 소음의 강도가 평소보다 반 옥타브쯤 낮아지는 것 같다. 바람이 불 때마다 텅 빈 벤치에 앙상한 이팝나무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바로 옆에 벤치가 있는데도 할머니는 그곳에 앉는 법이 없다. 언제나 한 발짝 떨어져 화단 갓돌에 앉아 있을 뿐이다. 오늘따라 할머니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늘이 깊어 보인다.

 

바람이 차다. 길을 건너온 발걸음들이 무심히 지나친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멀어지면서도 참기름과 된장을 앞에 두고 쓸쓸히 앉아 있는 할머니의 모습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삶이란 그런 것일까? 굽이굽이 흘러간 서러운 강을 뒤에 두고 애달프게 저물어가는 것. 결국 외면하지 못하고 벚나무가 늘어서 있는 아파트 화단에 이르러 할머니를 건너다보고야 만다.

 

한 아주머니가 손가락으로 참기름을 가리키며 가격을 묻고 있다. 비둘기 몇 마리가 날개를 접으며 그 주위에 조용히 내려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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