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못 / 허정열

 이사를 하고 못 박을 자리를 탐색한다. 되도록 같은 곳을 활용하려는데 쉽지 않다. 새로운 곳을 찾아 못질을 시작해본다. 한 번에 박히지 않고 못이 자꾸 튕겨 나간다. 몇 군데 흠집을 내고 나서야 겨우 못이 자리를 잡는다.

적당한 깊이로 박힌 못을 흔들어 보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다. 단단히 자리 잡은 모양이다. 곳곳에 못을 박고 액자도 걸고 시계를 걸어둔다. 하지만 이사 가고 없는 옛 주인의 못 자국은 그대로 남았다. 무엇이 걸려 있었는지 상상만 해볼 뿐이다.

20년 전, 형제끼리 새로운 계를 만들고 계원을 채우기 위해 옛 동료였던 친구를 만났다. 그녀는 결혼 전 나와 함께 근무하던 직장 동료이다. 성격은 다르지만 우린 서로 그 다름을 인정해 주는 편이다. 결혼 후 그녀의 삶이 달라졌다 해도 서로의 믿음에는 변함이 없다. 나도 그녀도 두 아이의 엄마이고 남편의 직업이 공무원인 우리는 간단한 안부로 궁금증을 풀었다.

그녀는 여전히 고상한 쪽으로 기울어 있었고 나는 억척스러운 계주契主가 되어 있었다. 그네에게 계원이 될 것을 청했다. 대뜸 그녀는 “계가 끝날 때까지 절대 죽으면 안 돼.”라며.” 조건부 계약을 선언했다. 물음표를 던진 그녀의 말에 난 마침표로 확신을 주어야 했다. 그녀는 간편하지만 명료함을 택했고 난 견딤을 선택해야 했다.

죽음이라는 말이 빛의 속도로 다녀간 뒤, 대책 없이 가슴이 두근거렸다. 갈 곳 없는 벼랑까지 밀린 기분이었다. 그녀가 남기고 간 말을 더듬어 보았다. 무모한 도전은 하지 않겠다는 그녀의 말은 빡빡한 현실 앞에서 못이 되어 내게 파고들었다.

뺄 수도 다시 수정할 수도 없는 못이다. 말랑말랑하지만 만질 수 없고 형체가 없어 소리로만 존재한다. 이해의 폭과 공감 능력이 필요해 같은 말도 받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느낄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그녀의 농 같은 말은 뜨거운 숙제로 남겨졌다. 그녀가 계원이 되면 2년 동안은 어떤 일이 있어도 살아 있어야 했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한 그녀와의 약속에 흠집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말못에 걸린 난 한참 동안 많은 생각을 키웠다. 일탈을 꿈꾸는 시간이 다가와도 무심히 흘려보냈다. 그녀의 말못에 언제까지 나는 걸어둘 수 없어 여러 번 계획을 수정하기도 했다. 못 자국을 지우기 위해 욕망과 갈등도 훌훌 벗어던졌다.

무사히 2년이란 계약이 끝났다. 잘못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마음이 가벼워졌다. 무사히 책임을 완수했다는 홀가분함으로 완성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책임져야 할 어려움은 무사히 넘겼는데 가슴속 말못은 떠날 생각이 없었다. 2년이란 시간 동안 부정을 긍정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기도 했는데 떠날 채비를 하지 않고 가슴에 흔적을 남겼다. 하지만 매일매일 아파야 하는 자기만의 비밀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성장의 조건이라도 되었는지 자국은 조금 헐거워져 있었다. 내 가슴에 박혔던 못이 늘 긴장하며 살라는 경고였던 모양이다.

그녀의 한마디는 말과 행동을 조절하고 멈추게 하는 역할을 톡톡히 해 주었다. 지독한 삶이라도 쉽게 포기하거나 달아나려는 마음을 먹지 말라는 일침도 들어 있었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따끔하다. 죽으면 안 된다는 경고를 들은 후, 내 속에서 문득문득 되살아나는 죽음을 지우며 견뎠다 나아감과 멈춤이 한몫처럼 닿아 있어 나아가다 숨이 차면 쉬어가는 지혜도 찾아주었다.

지금도 그녀와의 인연은 이어지고 있다. 만날 때마다 말못에 걸렸던 그때가 떠올라 혼자 미소 짓게 된다. 그녀는 나의 웃음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나의 공간에 그녀의 언어가 살았던 지난 시간은 속도보다 방향을 제시한 새로운 힘이었다. 풋감처럼 내 삶을 새로운 활기로 채워준 친구의 말은 지금 생각해 보면 뜻밖의 선물이었다.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