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금치 한 소쿠리/공순해

 

아는 분이 한 소쿠리 되는 시금치를 나눠줬다. 시장 물건이 아닌 야생 시금치라고 보물 건네듯 은밀히. 2월도 안 된 날씨에 스캐짓 밸리 그 추운 벌판에 가서 캐 온 것이라니 하긴 보통 물건은 아니다. 하지만 들여다보니 시금치 꼴이 꾀죄죄하다. 채도 짧고 캐 온 시간이 지났는지 빛깔도 새들거려 볼품이 없다.

 

 게다 난 부엌일을 하지 않는다. 부엌이 없기 때문이다. 하긴 부엌일 하지 않는 사람이 나뿐이랴. 미국 주부 중엔 부엌을 두고도 집에서 요리 안 하는 여자들이 꽤 된다고 한다. 그들은 직장에서 일이 끝나면 어느 곳에 가서 저녁을 해결할까, 인터넷을 뒤진단다. 나야 그들과는 경우가 다르다, 며느리에게 부엌을 내준 탓이다. 일단 물려준 공간은 그 애 소관이다. 한 공간에 주인이 둘이면 책임 소재가 불분명해진다. 해서 난 아예 부엌에 안 들어간다. 부엌이 없는 이유다. 이것이 내가 세운 졸가리()이며 그 애와 삶을 나누는 방법이다.

이 핑계로 시금치는 냉장고에서 며칠을 지냈다. 토요일 오후 아이들이 집을 비운 사이, 아무래도 찜찜해 시금치를 꺼냈다. 받을 때도 시원치 않았으니 꼴이 더욱 새들새들하다. 주인에게 사랑받지 못한 강아지의 짧은 꼬리처럼 풀이 죽어 있다. 이걸 어쩌지? 잠시 시금치 봉지를 붙잡고 속에서 싸움이 벌어졌다. 그러다 어느 순간 작심이 섰다. 그래! 캐 온 사람도 있는데, 해보자. 자정이 되자 봉지를 활짝 펼쳤다.

 

 벌판의 풀처럼 보이는 꼴에 놀랍게도 뿌리를 달고 있다. 뿌리 달고 있는 시금치 본 적이 언제던가. 아련해지는 심정에 손을 넣어 속을 뒤집어 보았다. 야성의 냄새가 알싸하게 피어올랐다. 이건 시금치를 지나 아예 냉이로구나. 강렬한 대지의 냄새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재빨리 그릇을 찾아 그것들을 물에 담갔다. 물속에 들어간 물건은 금세 풀기가 살아났다. 잠들었던 아기가 기지개 켜며 방긋 웃듯 잎이 살아났다. 푹 잠기게 물을 더 부었다. 잠시 후 들여다보니 뿌리들이 다리를 뻗고 하늘을 향해 노래하고 있었다. 바람과 비를 기다리는 뜻은 내 임을 그리워함이지요. 대지에서 힘차게 빨아올린 양분으로 힘을 내, 임을 찾아갈 거예요. 암수딴그루인 시금치의 연가였다. 그건 유쾌한 광경이었다.

 

 뿌리를 잘라내려고 칼을 찾다 생각을 바꿨다. 대지와 속살을 맞대고 사랑을 꿈꾸었을 그 뿌리들을 버릴 맘이 없어졌다. 수돗물을 틀어 흙을 씻어내며 손톱으로 뿌리와 잎 사이를 긁어냈다. 앙증맞은 분홍빛이 선명해졌다. 분홍 모자와 의상으로 차려입고 봄나들이 나선 세 살짜리 아가씨 같은 분홍빛. 아이고야! 저절로 경탄의 말이 튀어나왔다. 이건 생각지도 않은 새로운 세상이네.

 

 손톱 밑에 흙물 들 걱정도 잊은 채 하나하나 정성 들여 닦았다. 아마 아이들이 봤으면 어머니 뭐 하나 궁금했을 것이다. 그래 대지와 연애하는 중이다. 혼잣말로 대꾸하며 실실 웃음까지 나왔다. 뿌리를 통해 몸으로 전해지는 사랑의 간지러운 기운이 바람난 할망구를 만드나 보았다.

 

 야생 씨가 벌판에 떨어져 간난(艱難) 속에 씨를 발아시켰을 과정, 뿌리 내려 땅을 그러쥐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했을 과정이 가슴 저리게 다가들었다. 그리고 영하의 매서운 추위 속에 얼지 않기 위해, 잎에 당분을 더해 몸을 지켰을 광경이 환하게 떠올랐다. 그 당분은 어디서 왔을까. 대지로부터 왔겠지. 대지와 나눈 긍휼한 사랑. 그리하여 눈 녹은 밭에서 푸르게 살아남은 결정(結晶)이다. 땅바닥에 바싹 달라붙어 웅크렸던 이파리가 슬슬 올라가는 기온에 저절로 팔을 벌려 하늘을 품었을 때의 환희가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생각이 이에 이르자 낯선 땅에 활착(活着)하려 견뎌내는 사람들의 모습까지 떠올라 시금치가 더욱 애틋해졌다. 무풍(無風)의 알맞은 온실 속에서 물 줘가며 기른 것과는 격이 다르게, 황당하다 못해 살벌하기까지 한 대지와 교합을 나누며 스스로 이룩한 생명 아닌가. 이 식물은 떠나온 땅에서도, 살고 있는 땅에서도 튼튼하게 뿌리를 못 내리고 부유하는 인간들보다 훨씬 더 생명의 졸가리를 그러잡을 줄 안다. 아니 오히려 몇 수 위다.

 

 하여 나를 만나러 이 부엌에 도착한 시금치. 무당 칼 어르듯 집중해서 씻어 건진 시금치를 놓고 잠깐 궁리에 빠졌다. 이걸로 뭘 해야 이 갸륵한 생명을 더욱 장하게 할꼬. 뿌리째 나물로 무치면 나물로서의 태가 나지 않을 것만 같다. 결국 국을 끓이기로 했다. 아이들도 국을 좋아할 듯해, 몽땅 냄비에 넣고 국물을 잡아 멸치와 파 마늘을 들러리 세워 사골 고듯 푹푹 고았다. 시금치는 또 한 차례의 변신을 위해 온갖 힘을 다해 끓었다. 기착지를 찾아 수증기 뿜으며 달리는 완행열차처럼.

 

 햇살을 한 줌이라도 더 받으려고 목을 빼고 발돋움하며 투쟁한 결과 얻은 단맛은 어떤 것일까. 불을 끈 뒤 보글보글 소리가 잦아들자 국자로 살짝 맛을 보았다. 달다. 그 뿐인가. 목을 타고 넘어가는 대지의 촉감. 그건 대지와의 접문(接吻). 몸 깊숙한 곳으로 흐르는 생명이었다. 아예 대지를 흡입한 느낌에 전율조차 일었다.

 

 

 이게 바로 야생의 은총이구나. 어느덧 나는 바람 부는 벌판의 푸른 채소가 되어, 달빛이 뿌려주는 생명을, 별빛이 내려주는 생명을, 태양이 주는 사랑과 감사를 가슴으로 받아 안았다. 시금치 한 소쿠리가 느꼈을 환희에 함께 빠져, 행복을 마구 나눠주고 싶은 오후 한나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