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M그 자리 / 장미숙

 

 

그날은 장맛비가 세차게 내렸다. 빗소리가 간이용 천막을 북채로 두들기듯 난타했다. 퇴원 수속과 서류를 발급받으며 남편이 병실에서 내려오기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비는 그칠 줄 몰랐다. 출입문 앞에 서서 차가 들어오는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자전거를 받쳐놓고 오만가지 생각을 부려놓던 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건물 한쪽 사각진 귀퉁이다. 작은 소나무 한 그루가 그늘을 만드는 곳이기도 했다. 그곳에 나는 얼마나 많은 번민과 고뇌를 뿌려놓았던가. 어떤 날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어떤 날은 빨리 떠나고 싶은 조급함으로 그곳에 서 있곤 했다.

어느 날은 자전거 짐받이에 과일이나 먹을거리를 싣고 또 다른 날은 세탁한 옷과 더러워진 옷을 싣기도 했다. 내가 자전거에서 짐을 내리거나 실을 때마다 문안에서 바라보던 사람들, 아니 아무도 보지 않을 때조차 나는 늘 누군가의 시선을 느꼈다. 어쩌면 내가 스스로 만들어 낸 허상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나는 두려웠고 소심했으며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말투, 발걸음 소리, 행동 하나하나에 신경 썼다. 문을 지키던 병원 직원의 한마디를 들은 후에는 말소리를 더욱 낮췄다.

“아, 씨, 귀찮게 하네. 제대로 좀 하지”

물론 그는 혼자 한 말이었지만 내가 들을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 그게 남편과 나에게 하는 말이라는 건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때 남편은 다른 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퇴원한 뒤 재입원하던 날이었다. 코로나가 한창이어서 병원 문단속이 철저하던 때였다. 특히 요양병원은 외부인 방문이 허락되지 않았다.

환자를 문 앞까지 데려다주고 돌아서려던 참이었다. 남편이 마스크를 잘못 만져 내려갔던지 그가 툴툴거리며 하는 소리였다. 무슨 기분 나쁜 일이 있었는지 아니면 환자에 대한 그의 평소 행동이 그런지는 알 수 없었지만, 등골이 오싹했다. 보호자가 가까운 곳에 있는 데도 저런 식이라면 평소 환자들에게 어떻게 대할지는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는 병원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으로 보였는데 언젠가 원무과 과장에게 꾸중 듣는 걸 본 적이 있다. 무뚝뚝하고 불친절해서 말 붙이기 꺼려지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가 문을 지키고 있으니 비위를 거스를 순 없었다. 그 영향이 어디로 미칠지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가족이 요양병원에 있다는 건 늘 몸을 낮춰야 하는 일이었다. 더더구나 남편처럼 마비가 있는 데다 체격이 큰 사람의 가족은 더했다. 간병인들에게도 말 한마디 크게 할 수 없었다. 수없이 허리를 구부리고 미안함을 표시했으며 더러는 수고비를 따로 건네기도 했다.

그렇게 오 년 동안 병원 후문 한쪽에서 자전거는 나의 지친 일상을 끝없이 반추하며 서 있었다. 개인 간병인을 쓰던 삼 년간 집안 경제는 뿌리째 뽑혔다. 매달 수백만 원의 간병비를 감당할 수 없게 되자 공동 간병실로 옮겼다. 그 후 남편의 전화가 잦았다. 간병인들이 함부로 대한다고 고통을 호소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전염병으로 보호자는 안으로 들어갈 수 없으니 간병인들의 행동을 짐작하기는 쉬웠다. 들어가 본들 무슨 소용이 있었을까마는 감옥 같은 곳에 갇힌 환자의 건강은 점점 나빠졌다.

공동 간병실로 옮기고부터 환자복 외에 따로 입는 옷이며 양말, 담요 등을 수시로 빨아서 가져다줬다. 일주일에 한 번씩 자전거를 타고 병원에 갔다. 집에서 삼십여 분이 걸리는 거리였다. 택시를 탈 수도, 뱅뱅 돌아가는 버스를 이용할 수도 없었다. 세탁한 옷을 전해주고 다시 빨래를 챙겨서 가져오는 동안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무시로 지나갔다.

병원 후문에는 나 말고도 많은 가족이 그곳을 서성였다. 보호자들은 그저 서로를 바라보았다.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그 감정들이 눈빛 속에 담겨 있었다. 수시로 환자들이 들고났으며 구급차가 항상 대기하고 있었다. 환자들의 상태는 걸어 다니는 경증에서부터 침대에 누워만 있는 중증까지 제각각이었다. 우리말이 서툰 조선족 간병인들이 나와서 담배를 피우기도 하고 잡담을 나누기도 했다. 물건을 사러 가는 여자간병인과 출퇴근을 하는 병원 관계자들이 문을 들락거렸다.

간병인에게 가져온 물건을 건네주기 위해 기다리는 그 잠깐의 시간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긴 날들의 시초에 지나지 않았다. 처음 병원에 들어왔을 때는 몇 개월 지나면 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그건 점점 현실과 멀어졌다. 침상에서 떨어져 다리뼈가 부러졌을 때 정형외과에 간 것과 비뇨기과 수술을 받기 위해 한 달 나와 있던 것 외에 요양병원은 어느새 남편의 생활공간이 되었다.

아무런 경고도 없이 삶의 장소가 변해버린 사람의 충격이란 어떤 것일까. 그것도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로 살아야 하는 그 절망감이란…. 극한의 견딤에 익숙해지는 수밖에 없다는 걸 서로가 차츰 인정하게 되었다. 재활은 의지와 가능성이 있는 사람에게 희망이 될 수 있을지 모르나 그 범위를 벗어나면 단지 허상일 뿐이었다.

병원에서 재활이나 치료를 하지 않는다는 건 요양원에 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는 걸 의미했다. 자전거에 마지막 과일을 싣고 병원에 갔을 때 이제는 너무나 익숙해져 버린 그곳에 한참 앉아있었다. 오 년 동안 숨을 헐떡이며 다녔던 보람 같은 걸 찾기에 현실은 잔인했다. 그 잔인함 속에 방치되어 버린 삶의 존엄성을 찾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실체는 현실을 일깨워주었다.

집이 아닌 요양원에 다시 그를 입원시키고 돌아오는 길, 비는 우산을 뚫고 어깨와 머리 위로 뚝뚝 떨어졌다. 심장이 빗소리처럼 팔딱팔딱 뛰었다. 길고도 긴 하루를 질질 끌며 나는 또 다른 세상 속으로 들어왔다. 잠시, 잠시만이라도 평화로움을 찾고 싶은 간절함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밤은 빗소리와 함께 침잠했고 잠은 요원했다. 하지만 어김없이 새날은 찾아올 것이었다.

나의 한숨이 뿌려진 그곳에 또 누군가의 눈물이 날릴지는 알 수 없다. 훗날 기억 속에 어떤 의미로 남을지도…. 그날처럼 오늘 밤도 빗소리가 요란하다.

<계간수필 2022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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