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희준의 노래 ‘하숙생’을 문우가 문자 메시지로 보내왔다. 오랜만에 들어서이기도 하겠지만 이만큼 나이가 들어서인지 가사가 유난히 가슴을 파고든다. 구름이 흘러가듯 강물이 흘러가듯 우리 또한 이 세상에서 하숙을 하다가 먼저 가신 이들처럼 소리 없이 가야 하는 게 인생일 것이다. 나도 몰래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는데 지나간 날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지나간다. 헌데 그 속에서 손을 흔들고 스쳐가는 한 모습이 있다.
그의 고향은 전남 순창이었다. 고등학교를 마치자 그는 대학에 들어가면서 하숙을 했다. 학교 옆이었다. 아니다. 처음엔 분명히 자취를 한다고 했고 자취집을 구한 걸로 알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하숙집을 정했다고 했다. 조금 엉뚱한 구석도 있지만 그의 집 생활은 비교적 넉넉했기에 하숙비 걱정은 없을 터였다. 그런데도 고등학교 3년의 전력을 내세우며 부득부득 자취를 하겠다고 했는데 왜 갑자기 하숙으로 바꾼 걸까. 하숙집은 자취집을 정했던 바로 옆집이라고 했다.
자취집에서 반찬거리를 사러 나가는데 한 아가씨가 바로 옆집으로 들어가더란다. 순간 내 성향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녀가 들어간 집을 바라보니 ‘하숙생 구함’이란 글이 붙어있더란다. 그는 앞뒤 가릴 것 없이 뒤쫓아 들어가 하숙을 하겠다고 했더니 여학생만 받는다고 하더란다. 허나 그가 어찌나 집요하게 간청하고 설득하여 물고 늘어졌는지 결국 허락을 받아냈고 그날부터 바로 하숙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순전히 한 번 본 그 아가씨에 빠져 그 집으로 들어간 것이었다. 나도 녀석의 하숙집엘 몇 번 갔었는데 괄괄한 성격의 그가 어찌나 그 집에선 고분고분한지 이상해 보일 정도였다. 바로 그 집 딸인 S여대생 때문이었다. 나도 그 여학생과 몇 번 마주쳤지만 말을 건네거나 해보진 못했었다. 하지만 녀석은 넉살 좋게 하숙집 주인에게 “어머니, 어머니”하면서 싹싹하게 해댔고, 늘 늦게 들어오는 주인아저씨 대신 남자 손이 필요할 일들을 곧잘 해주어 식구처럼 지내는 것 같았다.
그 집엔 꽤 큰 석류나무가 있었는데 그 시고 달콤하던 맛은 지금까지 잊어지지 않는다. 마당가엔 펌프도 있어서 여름이면 녀석은 그곳에서 등목도 한다고 했다. 하숙집이란 내 가족이 아니면서도 내 가족처럼 마음과 공간을 공유하는 곳이다. 특별한 음식을 마련할 때도 있지만 대개 일상의 먹는 반찬에 손님용 반찬 한 가지 정도 더 마련하고 식구들 식탁에 숟가락 하나 더 올리는 것이 일반적 행태였다. 물론 대대적으로 하는 그런 직업적 하숙과는 다른 경우다.
한 집에서 매일 같이 밥을 먹는 사이이니 가족이 아닌가. 그것이 1년, 2년, 3년으로 이어지면 가족보다 더 정이 들 수도 있다. 나는 직접 하숙할 기회는 가져보지 못했지만 친구의 하숙집을 통해 그 맛을 조금은 맛보면서 한껏 부러운 마음을 갖기도 했었다. 녀석은 그 집 딸과 상당히 관계가 진척되어 결혼을 하게 되지 않을까도 상상을 했었지만 인연은 거기까지만 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내가 볼 때 군 입대로 막이 내린 녀석의 하숙 생활3년여는 아주 행복한 시절이었다는 것이 분명하다.
내가 결혼해서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인데 시골에 내려가니 장모님께서 하숙을 치신다 했다. 웬 하숙이냐 했더니 마을 건너에 중학교가 생겼는데 학교 선생님 중 몇이 찾아와 부탁을 했다 한다. 환갑 나이에 어떻게 손님식사를 매끼 해 줄 수 있겠느냐고 거절을 했지만 드시는 식사와 반찬대로 해달라고 간청을 하니 거절을 더 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결국 처음에 선생님 둘을 받게 되었고 하나 더 늘어 셋의 식사를 해 주게 되었단다. 점심까지도 먹어야 하는데 집까지 먹으러 오는 게 번거롭고 불편할 테니 학교로 가져다주겠다고 했더니 학교에서 일하는 아이를 보내 가지러 오고 그릇은 퇴근 때 가져오곤 한단다.
그래도 부부만의 식사로 가벼울 수 있던 식탁인데 매끼 반찬 걱정을 해야 했고 늘 같은 반찬만 상에 올릴 수도 없으니 꽤 신경이 씌었을 법하다. 한데 매월 꼬박꼬박 정해진 날에 들어오는 하숙비에, 두 노인만 사는 집에 젊은 사람들이 함께 있는 것이 좋기도 했었나 보다. 장모님께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그 몇 년간이 참 즐거웠다고 하셨다. 거기다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간 후에도 가족과 함께 찾아오거나 명절 때 인사를 오곤 했다 한다. 장모님이 참 잘 해주셨던 것 같고 그들은 그들대로 가족과 떨어져 살면서 많이 외로웠을 텐데 장모님 덕에 가족의 정을 느끼며 살았던가 보다. 그렇고 보면 하숙집이란 피가 섞이지 않은 가족의 구성체요, 세상에서 가장 끈끈한 조직이 가정이라면 하숙집도 그만 할 것 같다.
친구의 하숙집에서 보고 느끼던 따뜻함과 스스럼없음, 어쩌다 처가에 갔을 때 한 상에 둘러 식사하던 하숙생 선생님들을 생각하면 요즘 가족끼리도 한 달에 한 번 함께 식사하기도 어려운 현실이 안타깝고 가슴 아프다. 그러니 아무리 피붙이라도 정이 자랄 수 있겠는가. 그저 가족이라는 의무감으로 겨우 지탱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한 상에 밥을 먹어야 정이 나고, 한 방에 잠을 자야 흉허물이 이해된다고 했던 옛 어른들 말씀이 결코 그르지 않으리라.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하숙집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가 아주 큰 인기를 끌었는데 하숙집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곳일 수 있지만 가장 사람 사는 맛을 느끼게 하는 우리만의 공유 공간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인지 최희준의 ‘하숙생’ 노래 가사가 더 실감나게 다가온다. 인생 자체가 잠시 머물고 가는 하숙집이고 우리 모두가 하숙생이다. 내 품안에 있던 자식도 어느 순간 제 날개가 생겼다고 그 날개 힘만큼씩 날아가 버린다. 손주 녀석들은 아직 날개가 없으니 저러지 곧 할애비 찾아오는 것도 핑계 앞세워 미루고 미루리라.
문우가 보내준 노래를 틀어놓고 듣노라니 내 집이라고 살고 있는 이 집도 하숙집이고 북적대는 아들네 식구도 얼마 후면 저들 길로 떠날 하숙생이 빤하니,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 강물이 흘러가듯 여울져 가는 길’이란 노래 가사가 꼭 맞는 것 같다.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말자
인생은 나그네 길 구름이 흘러가듯 정처 없이 흘러서 간다.
인생은 벌거숭이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가
강물이 흘러가듯 여울져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인생은 벌거숭이 강물이 흘러가듯 소리 없이 흘러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