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념을 하며 / 김은중

 

 

고등학교 2학년 말 시험에서 받은 성적은 문과 꼴찌에서 두 번 째였다. 예상했던 성적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이 앞이 캄캄한 나의 처지를 걱정한 게 아니라 도대체 누가 꼴찌를 했을까를 궁금해했다. 그 누군가를 찾아 나섰다. 우리 반에는 없었다. 점심시간 옆 반으로 가서 꼴찌 한 사람을 찾았다. 조용히 밥을 먹던 C가 손짓을 했다. 꼴찌는 C였다. 나는 체육관 뒤 담벼락 밑에서 C를 기다렸다.

C는 투덜거리면서 다가왔고 나는 C에게 위엄이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네가 아무리 공부를 못해도 그렇지 나까지 이기지 못하면 어쩌겠다는 거냐?” C의 말인즉 이랬다. 두 분기 연속 게시판에 ‘등교정지자’ 명단에 올라 있는데 어떻게 공부할 기분이 나냐는 것이었다. 그랬다. C는 등록금을 내지 못해 2학기 내내 게시판에 등교정지자로 이름이 올라 있었다. 참으로 야속한 게 가정형편이 어려워서 등록금을 내지 못한 것인데, 학교에서는 커다란 글씨로 등교정지자 명부를 작성해 전교생이 볼 수 있도록 게시판에 붙여두었다.

내가 다닌 학교는 군 자녀들만이 다닌 곳인데, 군 자녀는 등록금을 나라에서 대신 내주었다. 그렇지만 군인인 부모가 퇴직하면 일반인 자녀가 되어 직접 등록금을 내야 했다. C의 부친은 C가 2학년이 되었을 때 계급정년으로 퇴직을 했고 그러다 보니 형편이 어려워져서 등록금을 내지 못했다. 그 당시 제도가 퇴직하면 일시불로 얼마를 주고 1년 뒤부터 연금을 주었는데 부채가 있다든지 하면 일시불로 받은 것으로 갚고 빈털터리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부친이 받는 연금으로 자식 넷의 교육비를 충당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연 등록금을 내지 못했고 나 역시 C와 마찬가지로 등교정지자 명단에 이름이 올라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학교를 오지 않으면 무단결석을 근거로 한 처벌이 기다렸다. 딜레마였다. 학교에 오면 정문 옆 게시판에 붙은 등교정지자 명단이 나를 기다리고, 그렇다고 결석을 하면 무단결석이라고 처벌을 하니 말이다.

그런 심적 고통을 겪으면서 마음은 더욱 단단해졌겠으나 한편으로는 형언하기 어려운 낙담과 혼돈이 밀려오는 것도 피할 수는 없었다. C도 나도 열등감에 더해 열패감까지 밀려왔다. 다른 학생들은 방과 후 단과반 학원에 갈 때 우리는 학교에서 밤늦도록 공부를 했는데 내게 공부는 뒷전이었다. C도 그랬다. 성정이 나와 비슷했던 C, 그리고 고만고만한 다른 친구들 등등해서 우리는 잘 어울렸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C를 만나지는 못했다. 나도 C도 재수를 했는데 학원도 달랐을 뿐 아니라 재수를 하면서까지 친구들과 어울릴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는 같은 하늘 아래 살면서도 연락이 끊어졌다. 동기들 모임에도 아주 오랫동안 참석하지 않았기에 C를 만날 수 없었다.

어느 날 동기 주소록에서 C의 전화번호를 발견했다. 반가운 마음에 C에게 전화를 걸었다. 30년 만에 듣는 목소리였는데 C도 나의 목소리를 기억했다. C는 제약회사에서 일한다고 했다. 마음이 뿌듯했다. “그래! 너도 참 마음고생을 심하게 했을 텐데, 어려움을 딛고 일어섰구나.” “응, 고생 좀 했지. 너나 나나 머리가 나빠서 꼴찌를 한 게 아니라 현실이 암울해서 그런 거였지.” 우리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학창시절로 시작해서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었다. 고생을 많이 한 눈치였다. 그리곤 나나 C 모두 실수를 했다. 곧바로 만날 약속을 했어야 했는데, 바쁜 일들을 정리하고 만나기로 약속을 했으니 말이다. 세상과 사람의 미래를 어찌 알 것인가?

시간이 속절없이 흘렀다. 다음 주에는 꼭 만나야지를 수도 없이 반복했다. 휴대전화로 부고 문자가 왔다. “C 동기 별세. …” 동기들의 소식을 담당하는 동기에게 물었다. 간암이 발견됐는데 너무 늦었다는 것이었다. 허망했다. 경제적 어려움, 그것을 딛고 일어서면서 매사 남들보다 더욱 열심히 뛰어야 했고 그러다 보니 무리하지 않았나 싶었다.

그렇게 꼴찌 친구는 떠났다. 생전에 그를 만나지 못한 것이 내게는 응어리로 남아 있다. 죽음은 누구에게도 예고되지 않으며, 태어날 때는 같은 해에 태어나 평생을 만나며 서서히 도반이 되어 가지만 그러면서 삶으로부터 이탈하는 친구들을 남은 자의 힘으로 막을 수는 없다. 그저 지켜보는 것 말고는 다른 도리가 없다.

나와 동갑들은 전후 베이비붐 덕분에 99만 명이 태어났으나 벌써 30만 명 가까운 이들이 유명을 달리했다. 열 명에 세 명 꼴로 생을 마감한 셈이다. 며칠 전에도 한 친구가 지병으로 먼저 떠났다. 떠나는 이들을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은 그들이 죽음으로써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어느 연배나 마찬가지일 테니 살아 있는 자는 먼저 간 동갑내기들 덕분에 지금 숨을 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것을 깨달았기 때문은 아니겠지만 언제부턴가 우리는 동기회 행사를 할 때마다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에 이어 작고한 동기들의 명복을 비는 묵념을 한다. 지금 우리를 여기 있게 하는 힘은 순국선열과 더불어 작고한 동년배라고 생각해서이다. 그들은 지금 내가 살아 있음에 대한 감사의 염을 받아 마땅하다. 고교 졸업 후 평생을 만나지 못한 C에 대해서도 그렇게 빨리 간 것에 대해 애틋함이 있고 네가 가는 바람에 내가 살아 있다는 생각이 있다.

지금은 묵념을 하는 사람이 묵념을 받는 사람보다 많다. 하지만 더욱 빨리 흐르는 시간 속에서 그 수는 역전되지 않을까 싶다.

<에세이문학 2021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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