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하다 / 김애자

 

올해로 들어와 남편의 몸무게가 부쩍 줄어들었다. 아무리 공을 들여도 마른 나무에 좀 먹듯 뼈만 앙상하게 드러난다. 오늘도 병원에서 몸이 마르는 원인을 알아야 한다며 이런저런 검사로 하루가 꼬박 걸렸으나 협착증 외에는 이렇다 할 병명은 찾아내지 못했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옷을 갈아입고 이내 잠들었다. 근력이 떨어지고부터는 코골이도 사라졌다. 앙상한 몰골로 입을 반쯤 벌리고 잠든 모습이 꼭 플러그를 빼놓은 낡은 TV와 같다. 동적인 화면이 정지된, 무의식의 상태. 죽음과 닮아 있다.

노년의 시간은 고요하다. 지나온 시간의 흔적들마저 수성펜으로 메모지에 써 놓았던 일정표가 지워지듯, 생존의 이유와 그에 따르던 스토리가, 성취감으로 울려 퍼지던 칸타타 선율이 기억의 파일에서 거반 지워졌다. 때론 세 끼니 밥 먹는 일조차도 무작위다.

실존에 의미를 잃어버린 시간은 무료하다. 직함과 미래를 지향하던 꿈이 몸을 떠난 지 오래다. 과거와 미래의 경계가 지워지고, 의욕의 씨앗들이 더 이상 자라날 수 없는 불모지에선 밤과 낮도 말짱 공회전일 뿐이다.

또 하루가 저물어간다. 유리창으로 번지는 저녁놀이 추상적이다. 일몰의 시간에 쫓기는 해가 새털구름을 붙잡고 색 놀이를 벌이고 있다. 색채의 형상은 구름의 이동 속도와 부피에 따라 시시각각 변한다. 검붉기도 하고, 주홍으로 번지기도 하고, 핏빛으로 타오르고, 진보라와 울금으로 뭉쳤다 흩어지기도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빛의 발산엔 에너지가 없다. 에너지가 없는 허망한 빛의 짧은 유희, 그 아쉬움의 틈새에서 가까스로 찾아낸 맨드라미 꽃빛과 흡사한 놀 한 자락에 시선이 꽂힌다.

1969년 늦가을에 우리는 산동네에 있는 등나무 집 문간방에다 신접살림을 차렸었다. 대문 옆 작은 화단엔 서리 맞아 목 꺾인 맨드라미 몇 포기가 새댁의 시선을 끌어당겼다. 수탉 볏을 닮은 진홍색 시든 꽃이 부디 눈보라 치기 전 자기들 몸 좀 건사해달라는 간절한 눈빛을 새댁은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

연장이란 부엌에서 쓰는 식칼뿐이었다. 살림 나와 고작 저녁과 아침 두 번밖에 사용하지 않은 새 칼을 꺼내다 후물거리는 대궁을 꽃과 분리했다. 소담한 것 여섯 송이만 골라 작은 대나무 바구니에 담았다. 그렇게 건사된 맨드라미는 신혼방 화장대 위에서 겨울을 넘겼다. 그리곤 봄이 돌아오자 화단으로 다시 돌아가 우주 한 귀퉁이에서 수탉의 관모로 환하게 피었을 때, 우린 첫아기를 품에 안았다.

산 중턱에 자리한 달동네 문간채는 참으로 부실했다. 문짝도 달지 않은 반 평짜리 난달부엌엔 구들장 밑으로 바퀴 달린 연탄 박스를 깊숙이 밀어넣는 아궁이와 찬장 하나만 겨우 놓일 수 있었다. 반찬과 국은 주로 석유곤로를 사용했다. 방문 앞으로 너비 30센티 쪽마루와 뜰은 추녀마저 짧아 비가 오거나 눈보라 치는 날엔 방안 윗목에 신문지를 깔고 신발 두 켤레를 나란히 들여놓고 지내야 했다. 그러할망정 젊은 내외에겐 지상에서 가장 따뜻한 둥지였다.

그 따뜻한 둥지에서 아기가 태어났던 것이다. 아기는 삼라만상을 관장하시는 신의 선물이었다. 신의 선물을 품에 안고 눈을 맞추며 생명의 신비를 뼛속 깊이 새기던 서른 살 애아범이 저렇듯 저물어가고 있다. 비만 오면 길이란 길이 죄다 진창이던 그 산동네를 향해 자전거를 힘차게 밀고 오르내리던 서른 살 젊은이가 어느 결에 백발이 되고 만 것이다. 분명 어느 지점에선가는 생의 저편으로 사라져갈 생명의 실루엣이 어찌 저리도 고요한가. 마치 장롱 밑에 숨은 먼지의 집처럼 고요하다.

<에세이문학 2021년 가을호>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