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슬링 종목 중 그레코로만형이 있다. 자유형과 달리 상체만 공격하는 종목이다. 쓸 수 있는 기술도 단순하고 같은 체급에 덩치도 비슷하다보니 좀처럼 공격할 틈이 생기지 않는다. 시합을 벌이는 선수보다 경기를 지켜보는 사람이 더 용이 쓰인다. 공격할 기회를 찾으려고 서로 손을 부딪는 모습을 보다보면, 답답해하는 시청자의 마음을 대신해 경기 장면을 해설하는 사람의 입에서 ‘빠떼르 줘야 합니다.‘라는 말이 나온다. 경기방식도 낯설고, 잡았다하면 곧바로 승자와 패자가 가려지는 씨름을 봐왔던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지루하기 그지없다.
김홍도의 풍속화 '씨름'을 보면 짚신과 갖신을 가지런히 벗어놓은 채 상투 튼 두 사람이 씨름을 하고 있다. 누가 이기든 관심 밖인 듯 등을 돌린 채 우두커니 서있는 엿장수에 시선을 빼앗기다보면, 무심코 보아 넘길 수 있는 짚신과 갖신이 뭔가 뉘앙스를 풍긴다. 아무래도 씨름을 하고 있는 두 사람의 신분이 다른 것 같다.
둥그렇게 둘러앉은 구경꾼들의 모습에도 패가 갈려져있다. 다소곳이 갓을 벗어 놓고 모은 다리에 깍지를 끼고 있는 사람, 의관을 정제하고 부채로 입과 코를 가린 사람, 그들은 하나 같이 갖신을 신었거나 옆에 벗어놓았다. 느긋하게 앉아 있는 모습이 아마도 갖신을 벗어놓고 씨름하는 사람과 같은 편처럼 보인다.
갓이 아닌 끝이 뾰족한 모자를 벗어놓고 머리를 끼적이는 사람, 바닥에 손을 짚고 입을 벌린 사람, 짚신 신은 다리에 한 팔을 올리고 한 손을 뒤로 짚은 채 '허' 이 일을 어쩌나 하는 표정을 짓는 사람은 짚신임자 편인 것 같다.
씨름을 하고 있는 두 사람 중에 다리 한쪽이 들린 사람이 짚신 임자일 것 같다. 신분을 뛰어넘어 씨름판을 벌이는 걸보니 그냥 재미삼아 하는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한쪽 다리 잡혔다고 진 씨름은 아니다. 짚신 신는 하층민이 이런 기회가 아니면 언제 갓 쓴 양반을 이길 수 있겠는가. 다리 들린 사람의 상체의 모습이나 팔 동작을 보면 결코 지고 있는 씨름이 아니다. 다리를 잡고 있는 사람이 오히려 잡치기 당하고 말 모양새다.
씨름은 달리 장소가 필요 없다. 어느 정도 충격을 흡수할 수 있는 퍼석한 땅이나 풀밭이라도 좋고, 모래사장이라면 더 이상 좋은 장소는 없다. 특별히 준비물도 필요 없다. 서로 마음만 동하면 즉석에서 승부를 가릴 수 있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씨름을 많이 했다. 바다에 떠있는 섬처럼 삼면이 강에 둘러싸인 고향마을은 들 밖에만 나가면 모래사장이다. 강변에 소를 먹이러 가거나, 꼴을 뜯을 때면 무시로 씨름을 했다.
무슨 경기든 그냥하면 재미가 없다. 소를 먹일 때는 진 사람이 이긴 사람의 소이까리를 자신의 소에 묶고 어디로 도망을 가지나 않나 지켜봐야 하고, 이긴 사람은 수양버들 아래 늘어져 잠을 잔다. 꼴을 뜯다 씨름을 해도 마찬가지다. 꼴을 걸고 씨름을 한다. 각자 망태에서 꺼낸 꼭 같은 양의 꼴을 이긴 사람이 다 가져간다.
그렇게 씨름을 하다보면 주위에 사람이 모이게 마련이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동생이 '히야, 앵기거다라!' 한쪽이 응원을 하고 나오면 상대 쪽에서도 응원을 하게 되고, 같은 동네에 살아도 골목을 경계로 웃담 아랫담 패가 갈려 응원을 하게 된다.
사람의 마음이란 요상해서 패가 갈리면 금세 적으로 바뀐다. 둘도 없는 친구사이라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밤에 만나면 형님, 동생하며 주거니 받거니 술잔을 기울이던 정치인이 낮에는 여당 야당으로 패가 갈려 죽기 아니면 살기 식으로 싸움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여름밤, 그 날도 어김없이 마을 동산에 씨름판이 벌어졌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방학을 맞아 웃담 친구 집에 놀러온 나와 같은 또래인 이 친구가 아랫담 아이들을 다 이겨버렸다. 합천이 고향인 이 친구는 얼마나 씨름을 잘 하는지 ‘준비됐나?’ 심판이 자세를 잡은 양 선수의 등을 툭 치기 바쁘게 상대를 꺼꾸러뜨렸다. 차례로 여섯을 넘어뜨리니 아랫담 형들의 입이 딱 벌어졌다.
“어짜노, 네가 한 판 붙어라.”
형들의 말에 나는 죽어도 못하겠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며칠 전에도 형들이 싸움을 붙이는 바람에 이 친구와 마음에도 없는 싸움을 했었다. 씨름을 하지 않겠다며 버티자 “싸움에서 이기면 뭣하나 겁이 나서 씨름도 안 하는데!” 형들은 살살 약을 올렸다.
내가 꽁무니를 빼자 합천 친구도 어깨에 잔뜩 힘을 준 채 슬슬 내 주위를 맴돌았다. 실실 웃는 것을 보니 나를 깔보고 그러는 것 같았다. 거들빼기로 몇 판을 이기고 나니 눈에 보이는 게 없는 모양새였다.
“삼세판 말고, 한판으로 하자.” 홧김에 씨름을 하자고 했지만 엄청난 도박이었다. 씨름에 지는 날엔 싸움에서 이긴 게 별 의미가 없어진다. 밑에 깔리는 그 순간 기가 죽을 수밖에 없다.
맞잡고 보니 상대의 힘이 보통이 아니었다. 이제 와서 씨름을 않겠다고 말할 수도 없고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싸움한판 붙자고 하는 건데. 후회가 됐다.
씨름과 싸움은 확연히 다르다. 싸움에는 룰이 없다. 요리조리 치고 빠지며 기회를 엿보다 공격하면 되지만 씨름은 편법이 허용되지 않는다. 오로지 힘과 기술이다.
어깨를 짓누르며 밀어붙이는 상대의 힘에 나는 속수무책 밀릴 수밖에 없었다. 마치 양손으로 소뿔을 잡은 채 담벼락으로 뒷걸음치는 형국이었다. 안간힘을 써봤지만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도저히 이길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한 가닥 희망은 있었다. 그 친구는 친척 집에 놀러 오느라 튼튼한 반바지를 입고 있었고 나는 겉옷이자 속옷인 광목에 검은 물을 들인 홑껍데기 사각팬티만 입고 있었다.
밀고 들어오던 상대는 기술을 걸었다. 나를 들어 매치려는 순간 옷이 찢어졌다. 제아무리 힘이 장사라고해도 헐렁헐렁한 팬티를 잡고 수를 쓸 수는 없다. 상대는 내 다리를 잡으려고 상체를 숙인 채 앞으로 달려들었다. 나는 엉겁결에 뒤로 다리를 빼며 상대를 앞으로 휙 뿌리쳐버렸다. 상대는 허우적거리며 잔발을 놀렸지만 몇 걸음 가다말고 제바람에 넘어지고 말았다. 나는 얼떨결에 한판승을 했다. 견주다 놓친 화살에 까마귀 두 마리를 맞추는 것 같은 행운이었다. 친구는 억울했던지 눈물을 훔치며 집으로 가고, 개선장군처럼 나는 아랫담 형들에게 무동 태워져 동산을 한 바퀴 돌았다. 하지만 나는 기쁘지가 않았다. 속이 훤히 들어난 내 알몸만큼이나 부끄러웠다. 찜찜했던 그날의 한판승은, 정말 내가 이겼나? 몇 달 후 내 스스로에게 다시 물어야 하는 일이 생겼다.
강 건너 장터에서 씨름판이 벌어졌다. 장터 입구에 걸린 대형 현수막에는 ‘직통전화개통기념 씨름대회’라고 쓰여 있었다. 지서와 면사무소에만 있던 전화가 가정집에도 들어왔다고 축하잔치를 벌인 것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강 건너 중학교를 다녀야 했던, 다섯 개 면 사람들이 다 모였다. 장터마당 씨름장에는 내로라하는 씨름꾼들이 다 모였다. 우승자에게는 부상으로 황소 한 마리가 걸린 큰 씨름판이었다. 언감생심 황소는 씨름꾼이 탐낼 일이고, 응원하는 사람들은 오로지 자신의 고장 사람이 이기는 것에 관심을 둘 뿐이었다.
머리를 숙이고 상대의 가슴팍을 파고든 선수가 뒤집기 기술로 이길 때는 잠시 자기고장도 잊고 열광의 도가니였다. 지금이야 방송화면으로 자주 접할 수 있는 기술이지만 당시로서는 슬로비디오 없는, 전광석화 같은 그야말로 한 번 놓치면 다시 볼 수 없는 찰나의 예술이었다. 장터를 매운 사람들의 입에서는 ‘우와!’ 소리가 절로 나오며 놀란 입을 다물 줄 몰랐다.
동네 씨름만 봐왔던 나는 씨름꾼의 기술도 기술이지만 그날 처음 샅바를 봤다. 광목 끈을 허벅지와 허리에 두르고 맞잡은 씨름꾼을 보는 순간, 그날 밤 씨름은 억지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샅바는 내 것을 내놓고 상대의 것을 잡는 것이다. 행여나 욕심을 부려 상대선수가 샅바를 틀어잡지 못하게 하려고 너무 여유 없게 묶으면 허벅지 근육이 경직되고, 너무 느슨하게 묶으면 오히려 상대의 기술에 자신이 당한다.
씨름선수들이 알맞게 샅바를 매고도, 샅바싸움을 하는 것은 상대선수의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서다. 샅바를 잡기 전에는 모래판을 빙빙 돌며 눈싸움을 하고, 상대와 마주섰을 때는 앞가슴을 씰룩거리며 근육을 과시한다. 모래판에 앉아 상대의 샅바를 잡을 때도 마찬가지다. 일부러 다리에 힘을 주어 상대선수가 샅바를 한손에 틀어잡지 못하게 신경전을 벌인다. 거기에 말려들면 백 프로 실력발휘를 하지 못한다. 불만에 못 이겨 씩씩거리다 스스로 무너지고 만다.
호미걸이, 들배지기, 후려치기, 뒤집기 수많은 기술로 상대를 제압하는 씨름, 그 기술은 샅바가 없으면 사용하기 힘이 든다.
단원의 풍속도에는 왜 샅바가 그려져 있지 않았을까. 꼼꼼하게 그림그리기로 소문난 단원이 샅바를 빠뜨리고 그리지는 않았을 것이고, 서로 우기다 즉석에서 마음이 동해 씨름하고 있는 사람을 그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헐렁한 무명바지에 달리 샅바가 필요 없어, 그냥 붙들고 늘어진 그 모습을 그리지나 않았을까.
내가 씨름을 했던 날, 샅바를 매었더라면 아마도 나는 그 친구를 이길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상대의 바지를 잡은 채 씨름을 했고, 그 친구는 팬티만 입고 있던 나를 잡을 수가 없어 레슬링을 했다. 진정한 승부를 하려면 하다못해 단원의 그림처럼 샅바를 두른 거나 다름없는 무명바지를 입고하던지, 아니면 꼭 같이 팬티만 입은 채 빙빙 자리를 맴돌며 공격기회를 엿보는 그레코로만형 레슬링을 했어야 했다. 그건 진정한 씨름이 아니었다. 아마도 방송해설자가 내 모습을 봤더라면 저 선수 '빠떼르' 줘야 합니다.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 일을 떠올리면 쓴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