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 설핏 기울고 바람 선선해 어디로든 나가고 싶은 오후. 차 한잔하자는 친구 전화가 반가워 집을 나선다.
대형 쇼핑센터의 유리 벽 찻집에 들어간다. 커피를 받아들고 상점들이 훤히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는다. 날개옷 찾아 다시 선녀가 되고 싶은 여자들이 이리 많은가. 여자 옷 파는 매장만 즐비하다. 내 눈길도 어느새 가끔 들르는 옷집에 가 있다.
마네킹은 벌써 낙타 빛 가을을 입고 있다. 한쪽에 걸린 낯익은 원피스, 보름 전에 이 앞을 지나다 마음을 빼앗겼던 옷이다. 만지기만 해도 푸른 물이 배어날 것 같은 하늘색 원피스. 오래전에 즐겨 입던 것과 비슷해서 마음이 더 간 것일까. 저 옷을 입는다고 내 푸르던 날이 돌아올 리 없겠지만, 왠지 그때의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치마 끝단에 프릴까지 붙어 있어서 한결 가벼울 듯했다.
그날 나는 저 옷을 사지 못했다. 잠자리 날개 같은 천에 깊게 파인 가슴선을 보면서 아이고, 이 나이에 무슨! 무릎 위로 냉큼 올라앉은 치마 길이를 보고서는 조선무 같은 종아리를 어쩌라고, 생각했다. 아니 생각보다 높은 가격표를 보고 눈을 돌렸던가. 한번 입어나 보라는 말을 뒤로하고 종종걸음을 놓고 말았다.
팔 때를 놓치겠다 싶은 걸까. 판매원이 그예 하늘빛 원피스에 할인 팻말을 붙인다. 의자 등받이에 느긋하게 기대어 있던 내 허리가 자동으로 곧추선다. 할인율 숫자 40이 ‘사십시오, 사십시오!’ 내 욕구에 부채질한다. 저 원피스를 사야 할 까닭이 뚜렷해진다.
‘가슴팍이 파였으면 어때. 이참에 뽕브라 효과를 기대해볼까. 얇디얇은 천이 몸에 감겨 꼴불견 아니겠냐고? 흥흥, 혹시 알아. 내 라인이 아직은 봐줄 만할지. 좀 짧으면 어때. 상큼 발랄한 미시족 흉내 한번 내보지 뭐. 어쩌지, 할인팻말을 보자마자 쪼르르 팔리기야 하겠어.’
카페 안에서 노트북에 코 박고 뭔가에 열중하는 젊은 애들이 부러웠다. 나도 언제 그래 봐야지 했는데, 막상 무엇 하나 펴들지 못한다.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얼굴을 손으로 감싼 채 옷 가게 안에 감사카메라를 들이밀고 있을 뿐이다.
시간은 흐르는데, 친구한테서는 온다간다 말이 없다.
“어디야?”
“언제 도착해?”
연방 문자메시지를 날려 보낸다. 옷가게를 줌으로 당겨 놓고 휴대전화 화면을 흘끔거려 보지만 먹통이다.
긴 생머리를 늘어뜨린, 언뜻 봐도 세련돼 보이는 여자가 옷 가게 안으로 들어간다. 다른 옷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내 하늘을 향해 손을 뻗는다.
“어머나, 어떻해!”
나도 모르게 뒹겨 올라가는 엉덩이를 짐짓 눌러 앉히고 이미 식은 커피를 후루룩 들이켠다.
신바람이 난 판매원이 잽싸게 하늘을 끌어내린다. 사뿐 춤을 추며 내려오는 자락. 그 푸름을 앞섶에 대고 선 여자가 싱그럽다.
‘어머 예뻐라!’
내 속말을 듣기라도 했나, 긴 머리 여자의 입꼬리가 탄력 있게 올라간다.
나의 하늘을 가로챈 여자가 옷 가게를 나선다. 기다렸다는 듯 전철에서 내린다는 친구의 문자가 도착한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우물쭈물하다가 놓친 게 어디 원피스 하나뿐인가. 상가에 떠다니는 소리가 나를 향해 웃는 것 같다.
무심하게도, 친구가 들어서는 유리문 밖에 내가 놓친 하늘 한 자락이 걸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