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터는 사사시철 말을 걸어온다. 걸음한 사람의 감정 변화 따라 고요하거나 활기차거나 음산하기까지 하다. 그림을 감상할 때 느끼는 여백같이 빼곡히 들어차지 않고 빈자리를 내준다. 그래서 문학으로 치면 시詩와 닮아 있다. 무어라 한 마디 툭 던지고 상상을 자아내는 행간처럼 시시콜콜 갑갑하게 굴지 않는다. 사람에 비유하면 말수 적고 품 넓은 지기知己이다.
내가 공터란 말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주경야독의 꿈을 안고 객지생활을 막 시작한 해의 늦가을이었다. 그때 내 나이 열일곱이었는데 1976년 서울은 산업 열풍으로 몹시 분주했다. 신당동에 있던 소규모 봉제공장은 외가로 아저씨뻘 되는 분이 경영하고 있었다. 두려움 반 설렘 반으로 시작한 그 길엔 나보다 몇 살씩이나 어린 꼬마들이 먼저 자리를 잡고, 제법 텃세라는 것도 부렸다. 그 중엔 두계역(지금의 계룡역) 근처 팥거리 당숙네의 조카딸 옥희도 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가 어려운 가정경제를 걸머지고 취업한 어엿한 일꾼들이었다.
여름 날, 친척할머니를 따라 밤기차를 탄 나는 추석 쇠로 집에 다녀올 때까지 버스 타는 것을 몰랐다.행동반경이란 고작해야 먹을거리가 즐비한 골목을 빠져나가 삼성당 빵집을 지나고 우측으로 육교를 건너 중앙시장에 다녀오는 정도이고, 더러는 삼성당에서 좌측으로 길을 접어 한참 걷다 고가도로가 있는 사거리를 대각선으로 건너 우체국에 가 우표 따위를 사는 일이었다. 어쩌다가 시간이 나면 안채 또래 학생에게서 시집 등을 빌려 조용한 구석을 찾아들었다.
그런 내가 모처럼 기거하는 곳을 멀찍이 벗어나 보았다. 귀하게 허락된 어린 공원들의 휴일을 안채 김장 일에 동원시킨 친척할머니가 목욕비를 주며 밖으로 내보낸 것이다. 우리 어머니가 평소 외숙모라 부르는 황해도에 고향을 둔 어른인데, "서울에서는 일을 하지 않으면 밥을 먹을 수 없다."는 지론이 확고한 분이었다.
틀에 박힌 공간에서 벗어난 아이들은 골목이 왁자하게 재잘거렸다. 어디로 갈까 분분한 것이 자유의 아우성이었다. 그것도 잠시, 옥희가 나를 잡아끌며 공터에 가자고 했다. 어리둥절하여 그곳이 어딘가 물으니 가보면 안단다.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면서 나는 아이들 가는대로 걸었다. 짬만 나면 골방에 틀어박혀 책을 읽거나 펜촉에 잉크를 찍어대는 방안퉁수를 아이들이 제대로 파급시키는 중이었다. 날마다 소음을 쏟아내는 성동가스 벽을 끼고 나아가 몇 개의 남고와 여고를 지났다. 그리고 약수동 쪽으로 길을 잡았다가 다시 옥수동 이정표가 나왔지 싶다.
얼마쯤 걸었을까. 주택들도 골목길도 상인들 소리도 없는 빈 땅이 환하게 열려왔다. 운동장 몇 개를 합친 것만이나 했다. 서울이란 도시에 이런 노는 땅이 있었던가. 그 자체로 놀라움이었다. 아이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복판의 자그마한 언덕으로 가서 멈추었다. 제법 고향 언덕에 선 기분이 났다. 볼을 스치는 바람도 시원하고 맛있었다. 고등학생인 듯 단정한 청소년들이 모여 공을 차고, 개구쟁이들도 둘씩 셋씩 딱지를 치거나 뛰어다녔다. 그제야 옥희에게 이곳이 어디냐 물으니 공터라 한다. 왜 공터라 하냐니까 그냥 공터란다. 그때부터 나는 더 묻지 않고 내 식대로 빈터를 공터라 하는 거로구나 여겼다.
내가 자란 산간지역에서는 그런 말은 쓰지 않았다. 호미질이 가능한 땅엔 씨앗들이 계절을 다투어 뿌리를 내리고 알곡을 키워냈다. 그러다가 가을철 농작물을 거둬들인 논밭이 모두 빈 터였다. 아이들은 그런 곳에서 뛰며 뒹굴며 자랐다. 서울의 이곳처럼 봉분 꼴의 완경사 흙더미를 언덕이라 부르지도 않았다. 골짜기와 골짜기 사이라든가 급경사 낭떠러지라든가 키를 넘는 둔덕 정도를 언덕이라 칭했다. 그만치 언덕이란 말 이면엔 은근한 운치가 따라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니 나무 한 그루 없이 벌건 바닥을 내보이는 땅이 시시하게 와 닿을 수밖에. 하지만 공터라는 그곳에 다녀온 뒤로 다소 무료하던 내 서울생활은 한결 생기로워졌다. 팍팍한 현실을 벗어나 사유할 수 있는 공간이 생긴 셈이다. 자연스레 내 안엔여백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 여백은 무한대로 열려 다양한 밑그림을 그려 넣을 수 있었다.
이후 그곳엘 몇 번 더 갔었는지는 기억에 없다. 차츰 영역을 넓혀 남산 길을 가까이하다 보니 첫 친구처럼 마주했던 어설픈 공간은 아예 잊어버렸다. 그 후 수십 년이 흐르는 동안 공터라는 말조차 써보지 않은 것 같다. 게다가 국문학을 전공하고 언어를 부려 글 쓴다는 사람이 어쩌면 그렇게 내밀한 곳을 보지 못했는지. 헌데 그곳과의 해후는 시댁 문중회의에서 뜻하지 않게 이루어졌다. 옥수동에 살고 있는 종친이 초청하여 들렀는데 왠지 그 일대가 낯이 익었다. 빈터로 흙을 깎아내던 자리는 고층아파트가 즐비하고, 달동네인 듯 언덕진 지대에도 멀끔한 주택들이 다닥다닥 모여 있었다.
가슴엔 싸하니 그 시대의 우수가 밀물져왔다. 너무도 앳되고 순수해서 귀하게 남아있는 시절…. 밥 먹듯 철야를 하면서도 꿈에 대한 열망으로 스스로를 불살라대던 무수한 날들이 곱게 수 놓인다. 그때 첫 월급이 오천 원이었는데, 동생들 학비로 보내느라 난 무얼 먹고 살았는지 모른다. 명절에 옷이라도 한 점 사 입고 나면 그나마 월급은 반 동강이 났다. 먹자골목으로 유명한 신당동 골목의 다양한 먹을거리는 내가 애초 공터를 몰랐듯이 그것들의 맛을 잘 모르는 실정이어서 군침 한번 삼키지 않고 지나다닐 수 있었다. 그보다는 라면 한 개를 끓여 둘셋이 나눠 후룩거리면서도 바늘구멍만 한 희망에 기대를 걸던 행보였다.
이즈음 취업이 어려워 고생하는 청년들에게 자꾸 맘이 쓰인다. 천신만고 끝에 좁은 관문을 통과했다 해도 기반 잡기가 너무 어렵다고들 한다. 이들의 어버이 세대가 해쳐온 길이라고 해서 수월하고 평탄대로만 걸은 사람이 몇이나 되랴. 뜻을 둔 곳에 닿을 길이 아득하여 자칫 나약해지는 청년들 뉴스를 접할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 금할 길 없다. 공부하는 짬짬이, 혹은 근무하는 사이사이, 잠깐씩이라도 정신적 휴식을 찾길 권유한다. 반드시 깊은 명상은 아닐지라도 꿈을 향해 줄달음질 치는 길에 지치지 않게끔 마음속에 은밀한 공터 하나씩 품고 나아가길 고대해 본다. 그곳에 꽃도 나무도 그려 넣어, 실바람 눈짓에도 돌아갈 수 있도록 작은 창도 슬며시 열어두면 좋겠다. 아직도 내 가슴속 빈터 그곳엔, 긴긴 날의 여정을 어루만지는 푸른 초목들이 돋아나 다정스런 눈길로 어깨를 겯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