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 위에서 손광성  

  

일주일에 두서너 차례 산책을 한다근처에 있는 탄천을 따라 걷다가 공원 야외극장을 반환점으로 해서 돌아오는데왕복 3킬로쯤 된다무리 없이 소화할 수 있는 거리다.

탄천에는 두 개의 다리가 있다하나는 아파트 후문을 나서면 바로 보이는 곳에 있고다른 하나는 거기서 한참 더 내려간 하루에 있다상류의 것은 콘크리트다리이고 하류의 것은 나무다리다갈 때는 콘크리트다리를 건너 개울가를 따라 내려갔다가 돌아올 때는 나무다리를 건넌다같은 다리를 두 번 건너지 않는 것은 잠시 난간에 의지해서 쉬기에 나무다리가 더 편해서이다.

두 개의 난간 중에서 나는 대개 상류 쪽 난간에 몸을 의지하고 흘러오는 물을 바라보곤 한다그쪽이 더 아름답다든가 해서 그러는 것은 아니다나도 모르게 상류를 향하게 된다는 이야기다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나만 그러는 것이 아니었다다리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 열에 여덟이 상류를 바라보고 서 있는 것이었다.

하류 쪽 난간에 기대 서 있으면 흘러가는 물의 뒷모습이 보인다상류 쪽 난간에 기대 서 있으면 흘러오는 물의 얼굴이 보인다흘러가는 물은 늘 멈칫거리는 것 같다뒤돌아보며 가는 사람 같기도 하고떠나기 싫어서 미적거리는그래서 조금만 만류해서 금세 되돌아설 사람 같기도 하다또 어떻게 보면 잘 있으라고부디 행복해야 한다고 어깨 위로 손을 들어 저으며 떠나는 긴 머리를 한 연인의 마지막 손짓 같기도 하다흘러오는 물은강아지가 달려오듯이고양이가 꼬리를 치켜들고 벽에 옆구리를 비비며 오듯이수초며 모래톱 같은 것에 몸을 스치며 온다어떻게 보면 흰 이를 반짝거리며 달려오는 한 무리의 초등학생들 같기도 하고또 어떻게 보면 기쁨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를 쓰지만 어쩔 수 없이 배어나오는 여인의 몸짓 같기도 하다.

오는 물이 만남의 물이라면 가는 물은 헤어짐의 물이라고나 할까상봉의 기쁨이 넘치는 얼굴과 이별의 슬픔이 어려 있는 뒷모습같은 물인데도 다리를 경계로 해서 흘러가는 물과 흘러오는 물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인다.

어디 물뿐이겠는가인생이란 것도 현재라는 다리 위에서 보면 흘러가는 물이요 흘러오는 물인 것을이미 흘러간 과거와 지금 막 흘러오고 있는 미래그것이 현재라는 다리 밑을 지나가는 것이다흘러간 물에서 우리는 아쉬움을 느끼지만 흘러오는 물에서 우리는 희망을 본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류가 아니라 상류 쪽을 바라보는 것은 어쩌면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빛의 방향을 따라 움직이는 것은 목숨을 타고 난 모든 것들의 본능이니까이미 피어버린 장미보다 이제 막 피려고 하는 장미를 위해 우리는 기꺼이 지갑을 연다.

그러나 삶의 현장이란 언제나 장미밭일 수는 없는 것기대와 소망이 좌절되는 순간 우리는 하류를 향한다흘러가는 물과 함께 사라지고 싶은 마음이 우리를 돌려세우는 것이다비록 이 세상이 자살한 만큼 가치 있는 그 무엇이 아니라고 해도 말이다.

 

모든 것은 허상이다

가는 것은 가게 하라

 

강물에 투신자살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상류 쪽 난간이 아닌 하류 쪽 난간을 택하는지도 모른다.

한강대교는 투신자살하는 사람들의 선호하는 장소였다그래서 다리의 철제 아치에 올라가지 못하도록 양쪽에 미끈거리는 그리스를 발라놓은 적도 있었다그런데 사람들의 손가락 자국이 나 있는 곳은 상류 쪽이 아니라 하류 쪽이란 사실이다좌절된 삶이 가리키는 화살표는 분명 '흘러오는방향이 아니라 '흘러가는방향일 테니까.

후배 중에 자살을 입에 달고 살던 사람이 있었다그의 주장에 의하면고통 없이 생을 마감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눈 속에서 동사하는 것이라고 했다헤르만 헤세의 <크눌프>의 주인공처럼그러나 자살에 대해서 너무 많이 연구한 탓이었을까그가 자실을 시도했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없다자살에 성공했다는 소리도 들은 적이 없다.

서른 살 무렵이었으리라나도 가끔 자살을 생각하곤 했다좌절된 꿈 때문이 아니었다나의 꿈이란 한 목숨 걸 만큼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니었으니까인생이란 나에겐 이미 승부가 결정된 게임으로 보였다새삼스럽게 링에 올라가 땀을 흘리며 헛발질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나도 자살을 시도해 본 적은 없다가끔 머리로는 흘러가는 물을 향하고 서 있으면서도 가슴으로는 언제나 흘러오는 물을 향해 서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겠다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며칠 만에 산책에 나갔다그러나 오늘 나는 흘러오는 물을 바라보지 않았다하류 쪽 난간에 기대서서 내 시력이 더는 미칠 수 없는 데까지 멀리흘러가는 물을 바라보다가 돌아왔다언젠가 다시 돌아올 물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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