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 / 최장순
우사牛舍를 연다. 갇혔던 냄새가 일제히 코끝으로 달려든다. 제 익숙한 길로 달려가고 싶은 것들. 오랫동안 매어 있던 탓일까, 일어서던 관절이 무너지듯 주저앉는다.
어느 초원을 누비던 우공牛公인가. 제 살과 장기를 모두 내주고 무두질한 수많은 길을 이끌고 내게 찾아온 것들. 그들을 코뚜레에 꿰어 야전으로, 도시의 아스탈트로 끌고 다녔다. 우렁우렁 깊은 눈, 슬픔도 잠시 말뚝에 매어두고 주인이 가고 싶은 곳으로 이끌려간 것들. 반항은 금물, 복종만이 그들이 살 길이었다. 주인에게, 아니, 주인의 또 다른 상전에게 수없이 고개를 조아려야 했다.
이제 노쇠했다는 이유로, 주인 취향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컴컴한 신발장에 몰아넣은 것들. 한때는 건강한 그것들이 세상의 돌부리에 채이지는 않을까. 넘어지지는 않을까 염려도 했다. 어느 날 매복한 적들에게 다친 코끝이 안쓰러워 약을 발라주며 어서 낫기를 기원하기도 했다. 세상을 향한 뿔은 제 구실을 하지 못한 지 오래라는 걸 알면서도 그들을 대신해 성을 내지도 못했다. 그러나 잠시, 점점 몸이 늙어갈수록 관심도 줄어들고, 어느 집에 새 종種이 들어왔다는 소식에 마음은 그리로 향했다.
얼마나 서운했을까. 이제는 길도 침침해진 그것들. 오래된 사이일수록 예의를 갖춰야 하건만 믿음직스럽다고, 편하다고 함부로 대했다. 화풀이를 그것들에게 해대는 통에 아무 벽에나 뿔이 받히기 일쑤였던 그들이었다. 주인을 위해 일부종사한 그것들을 밤이면 우사에 처박아두고, 때로는 노상에 잠을 부리기도 했다. 그래도 주인이 잠깨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익숙한 길로 안내한 우직한 충신. 해줄 수 있는 건 혹사한 뒷발을 스페어 타이어처럼 충전시켜주는 것이 전부였다. 이제 그들을 놓아주어야겠다. 익숙한 길에 싫증이 날 대로 난 그들에게 새로운 길을 마련해주어야 했다. 아니, 그들이 싫증이 난 것이 아니라 내가 실증이 난 것일 테지만.
허약한 몸이라고, 이제 갈 길은 딱 한 곳밖에 없다고, 조용히 쉬게 해주려고도 했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보니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정해진 노선으로만 몰고 다닌 그것들이 안쓰러워졌다. 새로운 주인들을 그들에게 보내주어야 한다. 여태껏 가지 못한 길, 마음 놓고 초원을 누비던 원래의 태생처럼 그들은 멀리 바다 건너로 보내던가, 어느 알뜰한 집 살림꾼으로 보내야만 한다. 그들을 아끼는 또 다른 주인들은 마음이 살뜰해서, 좋아하는 먹이로 낯빛을 바꾸어 애지중지 우사로 모셨다가 아침이면 새 노선으로 갈아탈 것이다.
쿰쿰한 냄새를 옛 정처럼 남긴 채 코뚜레를 벗은 그들. 시원섭섭한 마음을 접고 그들을 떠밀듯 내보낸 내게 '아름다운 가게'는 '기부천사'라는 푸른 이름표를 남겨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