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에 대하여 / 맹난자
까닭도 없이 내 마음은 슬픈 사람들 쪽으로만 기운다. 내 몸속에 슬픔의 바코드가 많이 새겨진 탓일까. 싱싱한 것보다 상傷한 것에, 강한 것보다는 약자 편에, 그리고 행복한 것보다는 불행한 쪽에 마음이 이끌린다. 상한 과일에 향기가 더 짙고 병든 조개가 진주를 앉히듯 나는 제 살을 찢어 진주를 는 작가들의 남다른 창작 행위에 눈길을 뗄 수 없었다. 문학은 바로 상처에서 피어난 꽃이기 때문이다.
'병든 사람이 정상적인 사람보다도 자기의 넋에 더 가까이 가는 사람'이라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말을 나는 천천히 되새긴다.
정상인이 되려고 마약을 했다는 에드거 앨런 포, 비정상적인 것에서 기이한 아름다움을 발견한다는 보들레르, 자신의 삶을 "패배"로 규정짓고 자살로 마감하긴 했으나 예술을 항상 우선순위로 하였던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그리고 '영혼은 예술에게만 있고 인간에게는 없다'던 오스카 와일드. 그는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서 작중인물을 통해 그와 같이 역설하며 인생을 예술로, 그것도 유미주의적 예술로 바꿔보려는 시도를 꾀했으나 도리언의 파렴치한 비도덕성으로 인해 결국은 파멸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의 삶도 작중 인물처럼 비극으로 끝났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가 쓴 《지옥도》의 결말도《도리언 그레이의 초상》과 다르지 않다. 화가 요시히데는 불에 타 죽는 젊은 여인의 고통스런 모습을 보고 '지옥도' 병풍을 완성한다. 지옥에서 수레와 함께 불에 타 죽은 여인은 호리카와 대감의 미움을 산 요시히데의 딸이었다. 아쿠타가와는 오스카 와일드가 선언한 대로 '예술을 위한 예술'을 지향하며 미美의 이면에 숨겨진 악마적인 것을 파헤치려고 하였다. 세기말 풍조에 동조하며 그 자신 세기말 '악귀'가 씌었다면서 서재에 '아귀굴我鬼窟'이라고 써 붙여 놓고 인간 불신不信의 사바고를 극복하고자 애썼다.
사바고娑婆苦를 극복하고자 예술혼을 불러들였단 말인가?
'예술이 감정을 낳는 데 도움이 된다면, 예술을 감각적으로 지각知覺한다는 것도 태어난 감정 속에 이미 포함되어 있는 것일까?라고 묻던 비트겐슈타인의 말이 생각난다. 태어난 감정 속에 포함된 예술적 감각, 놀라운 감수성은 생래적이기도 하지만 그들의 무의식 속엔 어쩔 수 없는 슬픔의 바코드가 어릴 때부터 마련되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슬픈 마음은 괜히 일어나지 않는다. 모두 내재된 트라우마, 혹은 지난 업으로부터의 업력業力, 또는 습기에 따라 일어난다. 그것도 운명이라면 운명이다.
인간의 운명을 좌우하는 세 가지 불행 중, 첫째는 부모를 잃는 것이요. 두 번째는 중년 상처, 셋째가 만년의 무자식을 꼽는다. 철학자와 작가의 대부분은 어려서 부모를 잃었다. 그 치명적인 첫 번째에 해당한다. 철학자는 생의 고통 속에서 인생의 해답을 도출하고, 작가는 슬픔으로 눈물[작품] 꽃을 빚었다.
프로이트가 제시한 구강기는 출생과 함께 시작하여 대부분의 사람은 이유기에 끝나는데 구강口腔 수준에 고착된 사람은 입이 최우선의 성감대가 되기 때문에 줄담배를 피운다든지, 혹은 반복된 음주로 알코올중독과 마약중독을 앓게 된다는 것 또한 작가들의 결핍된 유년기를 말해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 세 살 때 천애 고아가 된 애드거 앨런 포는 전형적인 이 코스를 모두 밟았다.
《설국》의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 또한 세 살 때 양친을 모두 잃었다. 2년 7개월짜리 고아가 된 가와바타는 조부모에게 맡겨졌다. 일곱 살 때 할머니가 죽고 눈먼 할아버지와 외딴 오두막에서 8년을 더 살았다. 할아버지가 죽은 것은 가와바타가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장례식 날 갑자가 코피가 흘러내렸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정원석 위에 반듯이 누워 출혈이 멎기를 기다렸다. 처음으로 갖는 자신만의 시간이었다. '그때 외톨이가 되었다고 하는 불안감이 어렴풋이 마음에 떠올랐다.'고 쓰고 있다. 세상에 외톨이가 되었다고 하는 불안감과 고아로서의 심경을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어린애인 내가 왜 자꾸 풍경을 보러 동이 트는 것을 보러 쓸쓸한 산으로 혼자 간 것일까?"
그의 수많은 작품들의 대부분은 주인공의 죽음으로 끝난다. 작품 속에는 여행, 온천, 여관, 거울, 게이샤, 광대, 가설극장, 눈, 자살이 심상 이미지를 이룬다. 그것의 도달점은 고독, 허무, 도로徒勞의식이다. 세상이란 연극이 공연되는 가설무대라는 인식은 그의 사생관에 기초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는지 생각해본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지는 4년, 맹장수술을 하고 퇴원한 지 꼭 한 달만에 자살을 결행했다. 세인의 추측과 사인은 분분했다. 어느덧 74세의 노인이 된 그는 <16세의 일기장>에 썼던 것처럼 쇠잔해져만 가는 할아버지의 쓸쓸한 삶을 이미 자신의 몸 안에 옮겨와 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몸 안에 깊숙이 스며든 비애의 그림자. 마음속 그늘을 우리가 어찌 다 안다고 할 수 있으랴만 나는 생각해본다. 그의 삶 속에 어떤 형태로든 각인되었을 외딴집 풍경을. 문풍지의 울림보다 더 추웠던 겨울 밤, 눈 먼 노인의 오줌을 받아내는 한 소년과 그것을 한없이 미안해하시던 할아버지의 모습은 그에게 지울 수 없는 인생의 풍경으로 떠올랐는지도 모른다.
오래전 노산(이은상)선생의 시화전에서 뵈었던, 유난히 서늘한 그 분의 이마와 괴기 서린 눈을 떠올리면서 심층 내부의 복잡한 자의식의 균열을 나는 심정적으로 추정해볼 뿐이다. '이제 더 이상은…?" 그때 그 분의 자살을 납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랫동안 그의 의식을 지배했던 작가로서의 원관념은 죽음이었다.(하긴 내가 작가들의 무덤 앞에 서게 된 것도 그것과 무관치는 않다.) 어린 나이에 육친의 사별과 이 우주에 나 하나라고 하는 단독자로서의 고립감. 특히 인생은 쓸데없는 노고라는 '도로徒勞'의식에 나 또한 얼마나 공감하였던가.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작품을 쓰는 일은 자기 내부에서 허무의식이라고 하는 독을 제거하는 것"이라고 가와바타는 말했다. 나도 어느새 그분의 마지막 나이를 살고 있다. 어린애인 그가 동이 트는 것을 보러 쓸쓸한 산에 혼자 서 있는 모습, 그것이 내게는 보인다.
막심 고리키도 가와바타 야스나리처럼 어릴 때 양친을 잃고 염색업을 하는 외할아버지 밑에서 컸고, 나타이엘 호손과 사르트르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외갓집에서 자랐다. 조나단 스위프트는 아버진 얼굴도 모르고 생모에게 버림받자 큰아버지의 도움으로 성장했다.
톨스토이와 두보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어머니를 잃었다. 두보는 배다른 형제와 고모 밑에서 서럽게 자랐다. 휠덜린과 보들레르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의부의 손에 이끌려 기숙사로 들어가야 했다. 휠덜린은 '종은 바람만 불어도 제 몸을 울려 소리를 낸다.'고 노래하고 보들레르는 11살 때 '아! 내 넋은 금이 갔네.'라며 당시의 심정을 토로하기도 했다. 군의관이던 아버지가 농노에 의해 살해당하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던 도스토옙스키, 우리에게 아름다운 수필을 선사한 금아 피천득과 상허 이태준도 10세 이전에 양친을 모두 잃었다. 계모와 아버지와의 갈등으오 금붕어만 그리다가 자살한 이장희, 양자로 입적되어 남모르는 갈등을 겪어야 했던 이상과 아쿠다가와 류노스케의 외톨이로서의 그 고아의식을 나는 주목하게 된다.
"벽에 날아와 앉은 잠자리의 투명한 날개는 슬픔이어라."
아쿠타가와가 짧은 생애를 자살로 마감하자 그의 친구가 헌정한 추모시다. '투명한 날개'로 벽에 앉은 그의 영혼은 '슬픈 잠자리'다. 슬픈 영혼은 순도 높은 증류수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남긴 재산은 "때로 눈물을 흘렸다는 것 뿐"이라던 시인 알프레드 뮈세. 기이한 추악미를 찬양했던 보들레르, '슬픔과 아름다움은 하나'라던 안톤 체호프, '예술이 삶을 주도해야 한다'고 강조한 오스카 와일드. 그는 아름다움보다 진리를 더 사모하는 예술가는 아직 예술의 지성소至聖所에 이르지 못한 자라고 폄하하기까지 했다. 슬픔과 아름다움에 유난히 민감했던 이 작가들을 나는 사랑한다. 예술이 아름다우면 아름다울수로 그것은 원래 자기 자신이 잘못이라는 것을 느끼는 사람들의 작품이라던 J. 러스킨(<참깨와 백합>에서)의 말을 나는 곱씹게 된다.
불행이 없는 아름다움이란 떠올릴 수도 없다며 보들레르는 《악의 꽃》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울은 아름다움의 빛나는 반려자. 기쁨은 아름다움에 대한 가장 저속한 장식물 중의 하나'라며 자신이 불행해지면 불행해질수록 자신의 긍지는 더욱 커진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스스로 천형天刑에 처해진 시인 브들레르. 스스로 저주의 시인이된 폴 베를렌. 그도 오스카 와일드처럼 남색 사건으로 2년형에 처해졌다. 비참한 말년, 창녀 위제니의 방에서 혼자 숨을 거두었다. 회한과 굴욕으로 얼룩진 인생을 살았으나 폴 베를렌은 죽기 직전 시왕詩王에 뽑혔다. 인생에서는 패배했으나 문학에서는 이겼다. 키르케고르가 한 말이 떠오른다. '시인이란 남모르는 고뇌에 괴로움을 당하면서도 그 탄식과 비명이 아름다운 음악으로 바뀡게 하는 입술을 가진 불행한 사람'이라고 했던가.
선택된
황홀과 불안
이 두 가지 내게 있으니.
베를렌의 이 시구 석 줄. 눈길을 뚫고 찾아간 일본의 최북단 아오모리. 다자이 오사무太宰治 문학비에서도 이 글귀를 만날 수 있었다. 불문학을 전공한 다자이도 베를렌을 좋아했던가 보다. 인생에 대한 근원적인 비애감, 실의와 우울, 마약과 환각, 황혼과 불안으로 이어지는 나약함과 탐미주의로 이 두 사람을 묶을 수 있겠다.
다자이 오사무는 사람 인亻변에 근심 우憂, 뛰어나다는 '우優' 자로 문학론을 펼치기도 했다. 다른 사람을 걱정하고 타인의 쓸쓸함에 민감한 것, 슬퍼하는 것, 더 나아가 약자와 패배자 입장에 머물며 부끄러움을 철저히 인식하는 일이 문학이라고 하였다. 다자이는 아버지가 온당치 못한 방법으로 대지주가 된 것을 알았을 때, 어리석은 형태로 자신을 멸망시키는 일만이 사회에 대한 봉사라고 생각하며 심한 자학의 길로 빠져들었다. 스스로 인간 실격失格자가 된 다자이 오사무. 나는 출세한 사람보다는 패배자의 고백에 귀를 더 기울이게 된다.
왁자한 웃음 뒤에는 가면 있을 수 있지만, 인생에 져서 패배한 약자의 슬픔에는 가면 따위는 있을 수 없다. 슬픔은 유일한 진실이기 때문이다.
슬픔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정서 가운데 최고의 것이고 동시에 모든 예술의 전형이요. 시금석임을 나는 이제야 알았다. (…) 환락과 웃음의 그늘에는 거칠고 단단하고 냉혹한 기분이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슬픔 뒤에는 언제나 슬픔이 있을 뿐이다. 고통은 쾌락과는 달라서 가면은 쓰지 않는다.
이것은 영국 작가 오스카 와일드(1857-1900)가 쓴 《옥중기》의 일부이다.
긴 여름, 나는 학교에 휴학계를 제출하고 서울시청 부녀과에서 교양강좌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이었다. 당시 좋지 않은 강의가 없었지만 운명처럼 1962년 여름, 오스카 와일들의 이름이 내게 들어왔다. 강성일 선생에 의해서이다. 숙대 영문과 교수였던 그분은 오스카 와일들의 《옥중기》를 소개했다.
고뇌란 하나의 기다란 순간이다. 그것을 계절로 나눌 수는 없다. 우리는 다만 그 계절의 느낌을 기록하고 그 계절들이 되돌아오는 것을 적어둘 수 있을 뿐이다. 죄수들에게는 시간 그 자체가 진행하는 것이 아니고 회전할 뿐이다. 그냥 고통이라는 하나의 축의 주위를 맴도는 것처럼 생각된다. (…) 슬픔이 있는 곳에 성지聖地가 있다.
마지막 구절에 주문이 걸려 나는 그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고통이라는 하나의 축을 맴도는 수인囚人. 죄수들에게 형벌의 시간은 진행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회전할 뿐이라는, 그 여름 나는 퇴근을 해도 날이 어둡지 않았다. 하나의 기다란 축 위에서 무의미한 시간을 되풀이 하고 있을 때였다. 어떤 날은 출근하려고 눈을 뜨면 그레고리 잠자(카프카의 《변신》주인공)처럼 벌레가 되었으면 했다. 줄이 끊어진 악기처럼 나는 아무것도 소망할 수 없었다. 소망을 버리고 나니 차라리 홀가분했다. 까닭도 없이 저 밑바닥에서부터 차오르는 샘물, 그것은 근원도 알 수 없는 비원悲源이었다. 나는 그때, '슬픔이 있는 곳에 성지聖地가 있다'는 그의 비원을 알 것도 같았다. 그분의 차원을 이해할 것도 같았다. 비원은 마냥 슬프기만 한 비애悲哀와도 다르고 자비慈悲와도 같지 않다. 세상에 대해 쥔 손을 펴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슬픔 속에서, 슬픔을 뛰어넘는 무욕無欲의 대비大悲야 말로 비원悲源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슬픈 영혼은 순도 높은 증류수, 그 순도純度야말로 '성지聖地'가 허락되는영토이다.
'슬픔 속에 성지가 있다'는 주문은 나로 하여금 슬픔을 딛고, 일체 것의 연민인 "원悲源"을 끌어안을 수 있게 해주었다.
영국 문학의 귀재였고 사교계의 총아였으며 동화 작가, 비평가, 남색가, 죄수 번호 C33의 익명으로 《옥중기》와 <리딩 감옥의 노래>를 썼던 작가, 단막 비극 《살로메》와 장편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발표하여 19세기 말 데카당스 문학의 대표주자가 된 사람. 그러나 그 어떤 호칭도 그의 사람됨을 잘 말했다고는 보기 어렵다. 보르헤스는 그를 두고 '그 악의 습관이나 불행에도 불구하고 끄떡도 않는 순진무구를 계속 지니고 있는 사나이'라고 평가했다. 보르헤스의 말대로 그는 자신의 순수함 때문에 파멸한 사람이었다. 어린애다운 순진함과 방약무도한 오만함과 경솔함은 그의 운명을 파멸로 몰아넣는 무기가 되었건만 자중하기는커녕 독서로가 무례를 멈추지 않았다.
오스카 와일드는 남색사건으로 체포되어 2년 동안 옥살이를 하는 중에 어머니의 부보를 전해 듣는다. 총명한 아들에게 그리스 문학과 이탈리아의 고전문학을 지도하던 그의 어머니는 시인이며 비평가였다. 아들의 물명예로 죽음이 제촉되었다고 한다. 그는 옥중에서 '비애의 아름다움'에 대해 썼고 예수 수난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참회의 《옥중기》를 썼다. 감옥에서 석방된 뒤 수도원에 가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려고 했으나 거절의 답신을 받고는 그길로 영굴을 떠났다. 파리의 빈민가 어느 하숙집에서 쓸쓸한 최후를 마감했다. 2000년 5월 나는 페르 라세즈 묘역에서 그의 무덤 앞에 섰다. 파라오 형상의 젊은 남자가 부조된 흰 대리석 조각 작품엔 키스 마크가 가득했다. 그의 인생은 패배로 끝났짐나 그의 세기말적 문학은 그를 20세기 모더니즘의 선구자로 만들었다. 평론가 손튼이 말한 데카당스의 의미를 나는 그 자리에서 되새겨보았다.
데카당은 상반된, 그리고 분명히 양립할 수 없는 것에 끌려든 사람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영원한 것, 이상적인 것, 비세속적인 것을 그리원한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어린애다운 순진무구로 파멸에 이른 사람. 나는 그동안 세속적이지 못한 순수한 영혼들과 만나 그들이 겪은 비극적 사건 속으로 들어가 그 고통으로 내 슬픔을 완하하며 상처를 지워나갈 수 있었다. 슬픔을 지울 수 있는 지우개는 역시 슬픔인 것 같다.
적도 지역에서는 지극히 가는 실처럼 생긴 벌레가 인간의 피부를 뚫고 파먹는다. 그러면 무당을 부른다. 그가 마술의 피리를 불면 벌레가 홀려서 나타나 조금씩 몸을 펴면서 밖으로 나온다. 예술의 피리도 그러하다.
카잔차키스의 <어디세이의 싹이 내 마음속에서 열매를 맺을 때>의 말이다. 내게는 아직도 그 마술의 피리 소리가 필요하다.
"예술은 일종의 허위이다. 나는 이미 아름다운 허위를 사랑할 수 없다.'며 톨스토이는 진리를 사랑한다고 공표했고, 앙드레 지드는 '신의 세계에는 예술이 없다'고 언급했다. 나는 예술이 없는 천국보다는 슬픔뿐인 지상을 택하겠다.
내 몸속에 박힌, 실처럼 가느다란 벌레가 누군가 부는 예술의 피리소리에 홀려 슬금슬금 빠져나오는 걸 느낀다. 슈베르트으 <피아노 5중주>를 듣거나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1번>을 듣고 있으면 그 선율이 세포에 새겨진 내 슬픔을 손잡아 데리고 나오는지 그것들은 어느새 무화無化되고 만다.
매독에 목덜미가 잡힌 슈베르트는 운명을 저주하지도 않고 절망의 밑바닥에 고이는 샘물을 창작의 두레박으로 길어 올려 숭고한 아름다움의 음악으로 바꾸어 놓았다.
"내가 창조한 모든 것은 음악에 대한 나의 이해와 나 자신의 슬픔에서 탄생한 것이다. 오직 슬픔에 의해서 태어난 것만이 세계를 즐겁게 해주는 것 같다."며 31살의 나이로 지상의 겨울 나그네가 되어 우리 곁을 총총히 떠났다. 뫼리케는 그를 가리켜 '눈물을 통해 찬란한 햇빛을 보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지상에 겨우 35년을 머물면서, 모차르트는 죽기 두 달 전에 위대한 교향곡을 세 개나 내놓았다. 요독증이 뇌를 침범하고 물질의고통이 가장 혹심했을 때였다. '아름답게, 눈물이 날만큼 아름답게'라며 그의 곡을 지휘한 부르노 발터의 말이 떠오른다. 영화 <엘비라 마디간>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리면서 그의 음악을 듣고 있으면 '눈물이 날만큼 아름답게' 승화된 비애감이 슬픈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것이다. 고통에서 피어난 아름다움은 고통을 치유하고도 남는다.
니체가 고통을 통해 초인이 되었듯이 슬픔을 통해 우리는 자기 안의영토를 성지聖地로 확장할 수 있다. 슬픔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덕목이다. 눈물의 꽃 진주를, 슬픈 영혼들의 그 '눈물 꽃'을 나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오스카 와일드가 말한 대로 "슬픔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정서情緖 가운데 최고의 것이고, 동시에 모든 예술의 전형典型이며 시금석임을" 나도 이제야 알겠다. 이 글은 가면이 허락되지 않는 슬픔의 '순수'에 바치는 나의 헌사이다.